2022년 2월, 지난 20대 대선 캠페인이 한창일 당시 ‘대선에선 안 들리는 여성 목소리’란 제목의 칼럼을 썼다. “이번 대선처럼 젠더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후보와 정당이 젠더 갈등을 앞세워 갈라치기만 한 선거는 없었다”고 적었다. 그보다 더 나빠질 순 없을 거로 생각해 썼던 글인데, 틀렸다. 한국 정치는 선거 때마다 최악을 각오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 같다.
이번 대선은 18년 만에 여성 후보 없이 치러진다. 남성으로만 채워진 벽보를 보는 건 2007년 17대 대선 이후 처음이다. 역대급으로 늦게 발표된 공약집에선 이렇다 할 만한 성평등 공약을 찾아볼 수 없었다. 후보들은 교제폭력 등 각종 범죄 관련 공약은 내놨지만 구조적 차별에서 기인하는 문제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한때 너도나도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처했던 때와 달리 행여라도 페미니즘과 엮일까봐 피해 다니는 듯한 인상마저 받았다. 지금 한국 사회는 성차별 해소를 위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할 전환기에 서 있다. 기존 정책들의 성과를 면밀히 평가하고, 남녀 모두 공감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시점이다. 그런 고민을 하는 후보는 물론, 이를 대신하는 캠프 인사들도 찾기 어려웠다.
성평등 의제가 자취를 감춘 선거로 끝나지 않았다. 이번 대선은 후보와 유력 인사들의 ‘여성 혐오’가 공론장에 등장한 선거로 기록될 것이다.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의 TV토론 발언은 온라인 댓글창 욕설이 후보 검증이란 외피를 쓰면 언제든 공적 공간에 들어와도 되는 것처럼 보인 사건이었다. 이를 통해 논란을 키우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과거 욕설에 후보 아들의 막말까지 더해 치명상을 입혀보겠다는 고도로 계산된 발언으로 어느 정도 효과를 봤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폭탄’은 던진 사람에게도 충격을 안긴다. 여성 신체에 폭력을 가하는 발언이 혐오이자 또 다른 언어폭력이 된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정치인임을 다시 한번 드러냈으니 말이다. 그 장면은 세대교체를 통한 정치 개혁 필요성에 공감하며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에게도 과연 그런 일을 맡겨도 될 만한 사람인지 의심하는 계기로 두고두고 작용할 것 같다.
선거 막판 유시민 작가의 김문수 국힘의힘 후보 아내 설난영씨를 향한 발언도 빼놓을 수 없다. 대선 후보가 한 말도 아닌데 왜 자꾸 문제 삼느냐는 말로 피해갈 수 없다. 진영 내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그의 말은, 어떤 면에서는 의도적으로 도발된 이준석 후보의 발언보다 더 문제일지 모른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고, 정치판을 거쳐, 진보 진영의 주류가 된 세대들의 특권의식과 엘리트주의, 여성 비하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진보의 위선을 다시금 일깨웠다.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막말 논란과 네거티브 공세는 늘 있었다. 그렇더라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며 쏟아내는 혐오 표현, 편한 사람끼리 떠들다 불쑥 튀어나온 뿌리 깊은 편견 같은 것들은 공론장에 올릴 필요도, 그럴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대선 후보가 TV토론에서 하고, 유력 인사가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더구나 그들의 말이 공론장을 거쳐 퍼져나가는 순간, 그런 말을 해도 괜찮다는 잘못된 시그널이 함께 나간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선은 정치적 공론장에서 우리가 허용해도 되는 말의 범위에 대해 새로운 기준의 정립을 요구하고 있다.
오늘 투표가 끝나면 새 정권이 출범한다. 어차피 선거 캠페인은 이기려고 하는 거니, 그만 잊자고 하지 말자. 캠페인은 끝났지만 숙제는 쌓여 있다. 누가 되든 그 숙제를 잊지 말고 제대로 풀어주길 바랄 뿐이다.
김나래 사회부장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