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해킹땐 결제 먹통… ‘탈현금화’ 속 현금 지키기 움직임도

입력 2025-06-03 00:00
게티이미지뱅크

디지털화로 전 세계에서 ‘탈현금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에 맞서 현금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디지털 결제에 의존하면서 정전, 사이버 해킹 등의 비상 상황에서 결제가 마비되는 일이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2일 네덜란드 NL타임즈에 따르면 최근 네덜란드 중앙은행은 성인 1인당 70유로(약 11만원), 어린이 1인당 30유로(약 4만7000원) 상당의 현금을 항상 소지하라고 권고했다. 이는 비상 상황에서 72시간 동안 식수와 음식품 등 필수품을 구매할 수 있는 금액이다. 유럽에서 대규모 정전으로 결제 시스템이 마비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비상시를 대비해 현금이 필요하다고 알린 것이다. 네덜란드 중앙은행은 “정전, 은행 시스템 장애, 와이파이 중단과 같은 상황에서는 늘 하던 방식대로 결제할 수 없지만 현금은 거의 언제나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지난 4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정전으로 카드 결제가 중단되고 현금자동입출금기(ATM)가 고장 나자 현금의 중요성이 부각됐다. 스페인은 2023년 기준 오프라인 매장에서 현금을 사용하는 비중이 38%로 높은 편임에도 피해가 컸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결제 마비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2일 삼성페이가 3시간가량 결제 장애를 일으켜 실물 카드나 현금을 갖고 있지 않은 소비자들이 불편을 겪었다. 앞서 2021년 KT 통신 장애로 일부 지역에 정전이 발생하면서 카드 결제가 막히기도 했다. 교통사고로 변압기가 파손돼 주변 상점들의 전자결제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은 적도 있다.

디지털 취약계층을 위해 현금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모바일 및 카드 결제 등에 적응하지 못한 노인, 장애인 등이 소외되고 있다는 것이다. 스웨덴에선 실시간 모바일 결제시스템인 ‘스위시’ 애플리케이션이 보편화하면서 ‘현금 반란’이라는 이름의 시민단체가 등장했다. 이에 정부는 2019년 대형 시중은행이 적정 수준의 현금서비스를 의무화하도록 법을 개정해 2021년 전국에서 시행했다. 개정안엔 현금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불편을 겪지 않도록 거주지·사업장으로부터 25㎞ 내에 현금 지급소를 마련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노르웨이도 지난해 소비자의 현금 지불 권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금융계약법을 개정했다. 노르웨이는 현금 결제 비율이 3%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로 꼽힌다. 개정안은 자동판매기나 무인 가게를 제외한 모든 영업점은 현금을 받도록 의무화하고 이를 위반하면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했다.

세계에서 디지털 결제 비율이 가장 높은 중국에서도 인민은행이 현금 결제를 거부하는 기업을 단속하고 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거래의 투명성이 높아진 측면이 있지만 비상 상황에서 결제 취약성이 높아졌다”며 “빠르게 디지털화가 일어나고 있어 금융 접근성을 지키기 위한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구정하 기자 g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