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부끄러움의 이유

입력 2025-06-03 03:05 수정 2025-06-03 03:05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문형배는 자신에게 장학금을 주며 공부시켜 준 경남 진주 남성한약방 김장하 선생을 찾아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때 김장하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이 사회에 있는 것을 너에게 주었을 뿐이니 혹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아라.”

이 대사는 2019년 문형배가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됐을 때 진주지역 시민단체 사람들이 몰래 준비한 김장하 선생의 깜짝 생일잔치에 참여해서 한 말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김현지, 2023)의 첫 부분에 나온다. 이 다큐멘터리는 경남도민일보 편집장이었던 김주완 기자가 김장하 선생에게 1991년 인터뷰를 요청한 이래로 30년 동안 여러 방법으로 취재했던 내용으로 만든 영화다. 영화가 2023년 11월 개봉됐을 때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탄핵심판과 함께 김장하 선생의 장학생이었던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언급되면서 주목을 받게 됐고 올해 재개봉됐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에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김장하 선생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특히 공부하기 원하는 1000명 넘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조건 없이 장학금을 준 얘기, 100억원 넘는 돈으로 명신고등학교를 세우지만 자리를 잡자마자 국가에 헌납한 것이나 은퇴할 때는 장학사업을 벌이던 남성문화재단을 해산하고 남은 재산을 경상국립대로 이관한 것까지 셀 수 없이 많다. 명신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했던 이달희 교사의 ‘저분을 닮고 싶다. 닮고 싶은데 도저히 내가 닮을 수가 없다’는 말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어떤 깨달음이 왔다. 이렇게 부패하고 음모와 부정이 넘치는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세상이 아직 무너지지 않는 이유가 생각났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소돔과 고모라는 부패한 도시였다. 하나님은 그 도시들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흥정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런 대사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창 18:23~24) 이런 흥정은 열 명까지 좁혀진다.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창 18:32) 그런데 놀랍게도 열 명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멸망은 진행된다. 그런데 롯이 그곳에서 피신할 때까지 멸망은 유보됐는데 하나님이 이상한 말씀을 하셨다.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창 19:22) 롯 한 사람이라도 소돔과 고모라 성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멸망을 진행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영화의 중반쯤에 김장하 선생의 건물에 세 들어 자전거가게를 하는 상인의 인터뷰가 나온다. 30년 넘도록 가겟세는 처음과 같았고 심지어 코로나 때는 집세를 줄여주더라는 그 상인의 말이 소돔과 고모라 사건과 겹쳐졌다. ‘이 진주에 한 댓 사람만 있으면 땡이라… 한 사람밖에 없으니까 불행하지.’ 그러니까 김장하 선생 같은 한 사람이라도 있어서 이 세상은 지탱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아직 우리가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김장하 선생 같은 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세상이 됐지만 무너지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김장하 선생을 알아가면서 마음이 무거워진 부분도 있었다. 그가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가 우리 크리스천 때문이 아니라 김장하 선생 같은 이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우리는 김장하 선생 같지 않아도 예수를 믿어 의롭게 됐다. 하지만 그것이 김장하 선생과 같은 삶을 살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는 더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 더더욱 우리 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세상과 같이 불의와 불법, 부도덕과 탐욕 그리고 거짓과 이기적 추구를 해서는 안 된다. 구속의 은혜를 받은 우리는 반드시 그 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당연한 것 아닌가.

하정완 목사 (꿈이있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