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로회신학대에서 공부하며 한국교회의 예배와 음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장로회신대에는 나를 지도해 줄 교수가 없었다. 예배의 한국화를 주장한 학자로는 한신대학교의 박근원 교수가 유일했으며, 음악계에서는 나운영 작곡가가 “선(先) 토착화 후(後) 현대화”를 교회음악의 방향으로 제시했다. 직접 배우지는 못했지만, 두 분은 내 평생 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스승이었다.
“이번 개교 79주년 행사를 위해 음악부에서는 ‘한국교회 음악의 토착화’라는 주제로 강연과 연주회를 열겠습니다.” 신대원 3학년 때 학우회 음악부장을 맡아 이 행사를 기획했다. 서울대 국악과의 한만영 교수를 초청해 강연을 듣고, 박동진 명창을 모셔서 성서 판소리 ‘예수전’을 공연했다. 또한 내가 작곡한 한국풍 성가곡 몇 곡을 연주했다. 이는 장로회신학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신대원 졸업 후 신학석사(ThM) 과정에 진학했고, 1983년 4월 29일 용산교회에서 열린 서울서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주일은 삼각교회에서 부목사로, 주중엔 쌍문동 정의여자고등학교에서 교목으로 섬겼다.
“주님,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오더라도 우선 유학을 가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석사 과정을 마치자 더 깊은 공부와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미국은 비용이 많이 들어 학비가 없는 독일로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외국에서 공부하는 것은 무모한 선택이었지만, 구하면 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며 도전했다.
당시 경제적으로 도움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독일로 떠날 때 삼각교회 교인들과 아는 지인들이 모아준 돈과 내 통장에 있던 금액을 합해 500만원을 들고 비행기에 올랐다. “주님, 가진 돈은 이것뿐이지만 오병이어의 축복을 내리셔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게 해주세요.” 비행기에서 드린 이 소박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적은 금액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10년간의 유학 생활을 가능하게 하셨다.
독일에 도착한 후 먼저 쾰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해 공부하기 위해 독일어 어학코스를 신청했다. 그러나 본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나 늦은 시점이라 학교 기숙사엔 방이 없었고, 외부에서도 방을 구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한국 친구들의 도움으로 가톨릭 단체 오푸스 데이(Opus Dei)에서 운영하는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곳은 방값이 두 배로 비싸고 생활 제약이 많아 학생들이 선호하지 않는 기숙사였기에 방이 남아 있었다.
다만 보수적인 가톨릭 단체였던 오푸스 데이는 개신교 목사인 나를 정회원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다. 두 달이라는 짧은 기간 임시로 머물렀지만, 그곳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다. 이들은 개신교에 대해 형제애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하루에 일곱 번 기도회를 갖는 등 철저한 경건과 금욕 생활을 실천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들어간 기숙사에서 중세 예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으니 이 또한 축복이었다.
정리=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