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보다 무서운 약값”… 건보 지연에 혁신 신약 ‘그림의 떡’

입력 2025-06-03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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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허가 비율 주요국 못 미치고
다른 나라 비해 급여 적용도 늦어
환자 접근성 차별… 생존율 제자리
‘ICER값’ 탄력 적용도 확대돼야

A씨(53·여)는 지난해 10월 ‘간내 담도암’을 진단받았다. 암세포가 혈관 가까이 있어 수술이 어렵고 다른 장기로 퍼진 상황. 담도암에 쓸 수 있는 면역항암제와 일반항암제 병용 치료가 허가돼 있지만 해당 면역항암제에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한 번 주사에 1000만원 가까운 비용을 감당해야 했다. A씨는 “암보다 앞으로 들어갈 돈이 더 걱정됐다”고 했다. 다행히 가족·주변의 도움과 실비보험 덕에 항암치료를 시작할 수 있었다. 두 달 만에 암 크기가 줄어 항암치료를 마치고 수술할 수 있는 단계까지 호전됐다. A씨는 “나보다 가정형편이 안 좋은 환자들은 어떤 심정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A씨의 사연은 최근 한국의학바이오기자협회 주최 ‘혁신 신약의 가치 보상 명과 암-환자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약가 개선 방안’ 포럼에서 소개돼 참석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근래 면역항암제나 유전자세포치료제, 항체·약물접합체(ADC), 자가면역치료제 등 혁신적인 기술이 접목된 고가 신약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런 혁신 신약들은 여러 질환 치료에 허가를 받은 ‘다중 적응증’이 특징이고 유수의 국제 진료 가이드라인에서 ‘최고 혹은 우선 등급’으로 사용이 권고되는 추세다. 하지만 국내 환자들은 해외 국가와 비교할 때 혁신 신약의 혜택을 빠르게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건강보험 적용 지연으로 A씨 같은 사각지대가 다수 존재한다. 2022년 말 ‘전이성 담도암’에 유일한 1차 치료제로 허가받은 면역항암제(더발루맙)는 2년 넘게 건보 적용이 안 되고 있다.

해외보다 늦은 신약 건보적용

1일 글로벌 신약 접근 보고서(2023년)에 따르면 한국의 혁신 신약에 대한 환자 접근성은 허가와 급여 모두에서 주요국 대비 낮은 수준이다. 2012~2021년 기준 신약 허가 비율은 한국이 33%로 미국(85%), 일본(51%), 주요 20개국(G20·38%)에 훨씬 못 미쳤다. 같은 기간 신약 급여 비율은 22%로 미국(85%) 일본(46%) G20(28%)에 뒤처졌다. 또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KRPIA) 자료를 보면 2022년 기준 한국에서 혁신 신약 허가 후 건보 급여등재까지 평균 608일(약 20개월)이 걸렸다. 같은 시기 독일(281일) 일본(301일) 프랑스(311일) 등보다 현저히 길었다.


이에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환자와 가족은 물론 의료진까지 혁신 신약의 신속한 급여 적용으로 치료 기회를 늘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국혈액암협회와 간환우협회가 최근 소속 환자·보호자 119명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66%가 신약의 비급여로 항암치료를 고민하거나 미룬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 전원이 혁신 신약의 급여 적용 시기를 앞당기기 위한 제도 개선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KRPIA의 국내 의료진 100명 대상 설문에서도 전원이 혁신 신약의 허가부터 건보 적용까지 소요 기간이 길다고 답했다. 허가 후 급여 등재까지 적정 기간에 대해 의료진의 81%가 ‘최대 10개월’을 제시했고 그중 41%는 ‘6개월 이내’라고 답했다.

전홍재 분당차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기자협회 포럼에서 “최근 개발되는 혁신 신약들은 기전의 특성상 ‘다중 적응증’을 갖고 있으며 적응증 별로 그 효능을 입증하고 있다. 하지만 허가를 받아도 급여 적용은 제한돼 환자의 신약 접근성 차별과 생존율이 개선되지 못하는 결과를 야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담도암의 경우 2011~2020년 10년간 급여가 된 신약이 하나도 없었다. 담도암의 국내 5년 생존율을 보면 2011~2015년 28.9%, 2016~2020년 28.8%로 오히려 뒷걸음질쳤다. 반면 같은 기간 15개의 신약이 건보 적용을 받은 폐암의 5년 생존율은 27.7%에서 37.5%로 껑충 뛰었다. 34개 신약이 급여화된 유방암의 5년 생존율도 92.8%에서 93.9%로 소폭 올랐다. 담도암 치료에 허가받은 면역항암제가 급여화되면 환자들의 생존율과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할 것이란 게 전문가들 예측이다. 담도암은 국내 주요 암 발생 순위 9위(연간 7000여명 발생), 인구 10만명당 유병률이 세계 2위(2008~2012년)일 정도로 발병률이 높은 편이다. 게다가 사망률은 세계 1위로 혁신 신약의 사용이 향후 치료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전망된다. 전 교수는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은 다중 적응증을 가진 약제의 급여 적용이 늦어지는 경향이 있다”면서 “환자의 생존율 향상을 위해선 적응증 별로 차별 없는 혁신 신약의 접근성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ICER 값’ 유연 적용 사례 이어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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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도 혁신 신약의 환자 접근성 강화를 위한 제도 개선을 추진 중이다. 지난해 2월 발표한 제2차 국민건강보험종합계획(2024~2028년)에 ‘혁신 신약의 가치 보상’을 제시하고 신약의 혁신성을 급여 약가 산정에 반영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정부는 그간 건강보험 재정 부담으로 신약의 경제성 평가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해 빠른 급여화에 장벽이 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에 ‘혁신성이 인정되는 신약의 3가지 조건(대체 가능 제품 및 치료법 없는 경우 등)’을 지정하고 만족할 경우 주요 경제성 평가 지표인 ‘ICER 값(점증적 비용 효과비)’이 일정 수준을 초과해도 건강보험 신속 등재를 약속했다. 그리고 올해 2월 ICER값의 탄력 적용 첫 사례가 나왔다. 난치성 삼중음성유방암 치료제(사시투주맙고비테칸)가 허가 후 2년 만에 급여 적정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중증 암·희귀질환자들에게 꼭 필요한 혁신 신약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선 향후 이런 ICER값의 유연 적용 사례가 단발성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서동철 중앙대 약대 명예교수는 “외국에서는 혁신 신약의 가치 반영을 위해 다양하고 폭넓은 제도가 존재해 환자 치료에 빠르게 활용하고 있다”면서 “우리나라도 신약의 혁신적 가치를 반영할 수 있는 평가 기준 마련, 새로운 급여 적용 체계 개발, 신속 급여등재 시 가산율 적용해 약가 보상, 질병 위중도에 따른 ICER값의 탄력 적용, 선(先)등재 후(後)평가 제도 활용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