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를 기부자로… 외국인·탈북자 자립 돕는 다리 역할

입력 2025-06-07 03:05
‘더 브릿지’ 황진솔 대표가 최근 서울 강남구 코이카 이노포트 사무실에서 기관 운영 방침을 이야기하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황진솔(45) 대표가 개발도상국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와 유학생, 탈북민에 창업 자금을 대는 사회적 기업 ‘더 브릿지’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아무도 하지 않아서”였다. 자립을 위해 누군가의 손길이 절실하지만 좋은 투자처로 여겨지지 않는 그들에게서 그는 가치와 가능성을 보았다. 설립한 지 12년이 지난 현재 지원받은 창업가의 60%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이들에게 지원금을 재기부하고 있다. 최근 서울 강남구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 이노포트 사무실에서 만난 황 대표는 “창업은 돈 있는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고, 그들이 이를 증명했다”고 했다.

더 큰 변화 위해 ‘사람 돕는 일’ 꿈

황 대표는 2006년 한동대 재학 중 옌볜과학기술대 교환학생을 다녀오며 커뮤니티를 이끄는 리더 키우는 일에 대한 가치를 깨달았다. 그는 “조선족 친구의 아버지가 북한에 사업차 자주 가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가 주인공이 되기보단 그 일에 적합한 사람을 돕는 일이 더 가치 있다’는 관점을 가지게 됐다”고 했다.

이후 한 교회 비영리기관의 컨설팅을 돕다가 엉겁결에 창업에 발을 들였다. 황 대표는 “탈북민이나 개발도상국 사람들의 강점을 찾아 창업가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돕는 사업을 하도록 자문했는데 여러 상황과 맞지 않아 진행되지 않았다. 그런데 기관 관계자들이 제게 ‘이 일을 직접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해 떠밀리듯 회사를 차렸다”고 했다.

창업을 생각해본 적 없던 그였지만 ‘상생과 공존’이라는 소명에 대한 확신과 “평생 해도 끝없고 즐겁게 할 수 있겠구나”하는 호기심이 그를 설레게 했다. 초창기 그의 소명에 공감하는 지인들이 무급으로 일을 도왔다. 회사 설립 후 3년 정도는 아무런 수익이 없었다. 하지만 ‘자립을 통해 수혜자를 기부자로 성장시키자’는 꿈은 꺾이지 않았다. 10년이 넘은 지금 곳곳에서 그 열매가 맺어지고 있다.

긍휼 넘어 가치를 바라보다

더 브릿지는 ‘임팩트 기부’라는 용어를 만들어 사용한다. 금융 사각지대에 있는 이들에게 기부하고 그들이 성장해 다시 기부하는 것을 뜻한다. 투자와 기부의 중간 형태인 임팩트 기부의 의미를 설명하느라 애를 먹은 적도 많다. 개발도상국 사람들을 돕기 위해 현지로 진출하는 대신 현지로 돌아가게 될 국내 외국인 노동자를 지원하자는 개념도 마찬가지였다. 외국인 근로자가 유일하게 쉬는 일요일에 만나 교육하고, 특정 기술을 알려주기 위해 농장, 공장 등을 함께 다니며 창업 교육을 했다. 그렇게 2017년 네팔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 9명이 처음으로 본국으로 돌아가 창업했다. 이 중 4명은 현재 호텔을 운영하는 등 현지에서 어엿한 사업가로 성장했다.

이런 노하우가 쌓인 더 브릿지는 현재 코이카, 유엔 산하 유엔개발계획(UNDP)의 국내 외국인 노동자 창업 프로그램을 기획해 운영한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각 기관과 함께 네팔과 동티모르에서 온 노동자 100명의 창업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을 지원하는 코이카 이노포트 운영도 맡고 있다.

한국에서 교육을 받고 본국으로 돌아간 외국인 노동자들이 지난 1월 네팔에서 열린 사업 설명회에서 황 대표(뒷줄 가운데)와 기념 촬영하는 모습. 더 브릿지 제공

황 대표는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한국은 이제 외국인 노동자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나라”라면서 “표면적으로는 그들을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우리도 도움을 받게 된다”고 강조했다. 유학생이나 근로자가 자국에서 창업하면서 한국 청년, 기업과 연계돼 해외 취업과 진출을 꾀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네팔 히말라야 관광지에서 커피머신 수리점을 운영하는 산토스씨가 그렇다. 세계 여행객을 위한 커피숍은 많지만 수리 전문 인력은 부족한 상황에서 그는 수리업을 계획했다. 더 브릿지는 국내 전문가를 연계해 교육하고, 초기 투자 자본을 기부받아 그의 창업을 도왔다. 사업 2년 차인 산토스씨는 한국에 부품을 발주하는 파트너로 성장했고, 한국의 전문가로부터 새로운 수리 기술을 자문받으며 수익 일부분을 나눈다. 황 대표는 “수혜자와 기부자의 벽이 허물어지는 모습”이라며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긍휼의 시선을 넘어 그들의 가치와 강점을 바라봤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기독교인인 그는 “마치 하나님나라의 숨겨진 보물을 찾는 기분마저 들었다”고 했다.

기부자로 성장한 탈북민

탈북민 창업 등 북한 관련 사업도 다양하게 하고 있다. 지금까지 탈북민 150명 이상의 창업을 도왔다. 이 중 20명은 기부자로 성장했다. 황 대표는 “남한에 와서 기초생활보장수급자로 살 생각을 하는 탈북민은 단 한 명도 없다. 모두 자기답게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온 것”이라며 “이들은 자신이 비영리 기관에 후원한다는 사실을 엄청나게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했다.

외국인 근로자를 포함해 더 브릿지가 지금까지 지원한 창업가는 400여명이다. 황 대표는 “창업 2년 안에 지원받은 기부금을 재기부하는 목표를 설정해 놓았고, 60%가 재기부에 성공했다”고 했다.

‘한반도 임팩트 메이커스’라는 남북청년 프로그램을 통해 북한의 사회적 문제를 고민하기도 한다. 탈북 청년 1명 등 4명이 짝을 이뤄 실제적 문제를 정의하고 사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황 대표는 “미래 세대에게 통일에 대한 균형 있는 관점과 긍정적 상상을 하는 기회를 주고 싶다”고 했다.

더 브릿지는 현재 62개국 4000여명의 현지 창업가와 교수, 공무원과 연결돼 있다. 황 대표는 “과거 상상만 하던 일이 하나씩 이뤄져 가는 것을 보면서 감사한 마음이 크다”며 “개인적 욕망과 하나님의 비전을 잘 분별하면서 여는 것도 닫는 것도 모두 하나님이라는 믿음으로 살고 싶다”고 했다.

신은정 기자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