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식사하고 마음 나누고… 부자 가정 자립 돕는 ‘제2의 양육자’

입력 2025-06-03 03:05
구세군 한아름 직원과 부자(父子) 가정 아이들이 2023년 8월 강원도 춘천에서 열린 ‘마음 빼기 캠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구세군 한아름 제공

미성년 자녀를 홀로 양육하는 한부모가족이라면 으레 모자(母子) 가정을 떠올린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수가 적을 뿐 엄연히 존재하는 부자(父子) 가정들이 있다. 여성가족부 ‘2024년 한부모가족 실태조사’에 따르면 한부모가족 중 부자 가구는 20.3%에 달한다.

인식에서 먼 만큼 지원은 부족하다. 보건복지부 사회보장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23년 현재 저소득 한부모가족 지원 가구 중 17.9%는 부자 가정이다. 한데 이들을 위한 시설은 아직 부족한 편이다. 출산·양육·생활·일시지원시설을 포함한 전국의 한부모가족복지시설 120곳 중 부자 가정 관련 시설은 3곳에 불과하다. 이 중 한 곳인 구세군 한아름은 부자 가족 생활지원시설로 저소득 부자 가정의 돌봄 공백을 메우고 있다. 2010년 서울시 지원으로 한국구세군(사령관 김병윤)이 설립한 이곳은 미혼과 이혼, 사별로 한 부모가 된 부자 가정에 경제적 자립과 자녀 돌봄, 정서적 지지 등을 제공한다. 15년간 이곳을 거쳐 자립에 성공한 부자 가정은 23가정, 57명에 이른다. 지난 29일 서울 강서구의 한 빌라에 자리한 구세군 한아름을 찾았다.

우리는 ‘한아름 빌라 가족’

구세군 한아름에서는 5가정이 지낼 수 있다. 시설엔 각 가정의 생활공간 이외에도 함께 식사하고 모임을 하는 여러 휴게공간이 있었다. 현재는 2가정이 살고 있다. 벽지와 장판 교체 후 입소 대기 중인 부자 가정이 들어올 예정이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건물 곳곳은 인형과 화초로 꾸며져 아늑한 느낌을 준다. 지난 2021년 이곳에 부임한 정수현(46·사진) 구세군 한아름 원장의 손길 덕분이다. 그는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안전하고 안락하다는 느낌이 들 수 있도록 꾸준히 공간을 정비했다”고 설명했다. 사회복지 24년 경력의 정 원장은 취임 이후 25년 이상 사용한 화장실과 창호 등 낡은 시설을 고쳤다. 정 원장은 “특히 여자아이들이 참 좋아했다. ‘이젠 아빠가 말하기도 전에 씻는다’고 하더라”며 “각 가정에서 개인 생활을 하면서도 한 가족처럼 정을 느낄 수 있는 게 우리 시설의 특징”이라고 했다.

구세군 한아름은 ‘아이 양육은 여성의 몫’이란 편견 탓에 주 양육자로 인정받기 힘든 부자 가정 아버지의 자녀 돌봄 지원에 주력하고 있다. 엄마나 조부모를 대신할 부자 가정의 ‘또 다른 가족’이 돼 주는 셈이다.

기관이 가장 중시하는 것 중 하나는 식사다. 직원들은 매일 저녁 식사를 직접 만든다. 정 원장은 음식으로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는 ‘푸드테라피’ 관련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식사를 함께하기 어려울 땐 음식을 가져가거나 선결제한 인근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도록 배려한다. 식당에 선결제된 이름도 ‘한아름 빌라 가족’이다.

자립 돕는 제2의 양육자
서울 강서구의 구세군 한아름 건물 옥상 정원. 신석현 포토그래퍼

구세군 한아름 직원들은 아이들이 교복을 사는 것부터 졸업식에 가는 것까지 부모가 필요한 순간을 함께한다. 생계 문제로 여의치 않은 부자 가정을 ‘제2의 양육자’로서 돕는 것이다. 딸에게 2차 성징이 찾아와 고민하는 아버지에겐 성교육을 해주거나, 소통 부족으로 자녀와 갈등을 빚는 이에겐 중간에 서서 대화의 물꼬를 터주기도 한다. 가정에 고립·은둔 청소년이 있을 땐 아버지 동의를 구해 생활이나 진로 지도도 하고 있다.

교회를 다니며 마음의 평안함을 찾고픈 이들에겐 신앙생활 방법도 안내한다. 정 원장은 “종교 강요는 따로 없지만 아이들이 교회 출석에 적극적”이라며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아버지도 자선냄비 등의 구세군 봉사활동엔 자녀를 꼭 참여시키려 한다”고 전했다. “나누며 사는 삶의 중요성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기 때문”이다.

부자 가정의 어려움 등을 공유하는 자조 모임도 활성화돼 있다. 매년 여름 부자 가정 아이들이 구세군 한아름 직원들과 함께 여행을 다녀오는 ‘마음 빼기 캠프’는 아이들 자조 모임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여행 주제와 여행지를 정하는 게 특징이다. 올해는 ‘역사’를 주제로 오는 8월 경주의 문화유산을 탐방한다.

아이들 약대·간호대 진학… 멘토로 활동
꽃과 장식품으로 꾸민 공동 공간 입구. 신석현 포토그래퍼

부자 가정이 구세군 한아름에서 지낼 수 있는 기간은 최대 7년이다. 거주 기간 중 자녀를 대학에 진학시킨 부자 가정도 꽤 된다. 정 원장은 “퇴소한 부자 가정 자녀 가운데 약사 꿈을 위해 약학대학원에 진학한 친구도 있고 간호대 진학 후에도 이곳에 와 멘토 역할을 하는 아이도 있다”고 했다. 이어 “교통사고를 당해 이곳에 왔던 한 아버지는 열심히 일하고 자녀를 양육해, 아이들이 다 대학을 졸업해 어엿한 사회인이 됐다”고 전했다.

퇴소 후에도 인연은 이어진다. 시설을 나간 뒤 아버지를 심장 마비로 갑작스레 잃은 가정이 그랬다. 예상 밖의 비보에 두 자녀가 힘들어한다는 소식을 접한 구세군 한아름은 이들의 정서적 안정과 학업 지원을 도왔다. 이들의 소식을 전하며 눈물지은 정 원장은 “한 가정의 회복을 돕는 게 우리 사명”이라고 했다.

구세군 한아름은 오는 10월 부자 가족 생활지원시설에서 양육지원시설로 변경된다. 양육지원시설이 되면 6세 미만 미취학 자녀를 둔 부자 가정의 입소가 수월해진다. 정 원장은 “한부모 부자가정 아버지는 적절한 기회와 지원만 있다면 훌륭한 양육자로 성장할 수 있다”며 “‘아버지 양육자’에 맞는 정부 지원 체계가 수립되고 이로써 부자 가정이 지역 사회에 온전히 연결될 수 있도록 우리 사회, 특히 한국교회가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