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객들이 불 끄고 대피… 대구 참사와 달랐던 ‘5호선의 기적’

입력 2025-06-01 18:58 수정 2025-06-02 00:00
소방대원들이 31일 방화 범죄가 발생한 서울 지하철 5호선 객차에 들어가 화재 상황을 살펴보고 있다. 60대 남성이 이날 불을 질러 승객 400여명이 대피했지만 다행히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영등포소방서 제공

2003년 192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구 지하철 참사와 유사한 방화 사건이 지난 31일 서울 지하철 5호선에서 발생했지만 대형 인명 피해는 없었다. 베테랑 기관사와 승객들이 위기 상황에서도 신속하고 차분하게 대응했고, 열차 내부가 불에 타지 않는 소재로 바뀐 점이 22년 전과 달리 대형 참사를 막은 이유로 꼽힌다.

지난 31일 오전 8시43분쯤 여의나루역에서 마포역 방향으로 달리던 지하철 5호선 열차 4번째 칸에서 60대 남성 A씨가 불을 질렀다. A씨가 인화 물질을 뿌리고 점화기를 사용해 옷가지를 태우면서 순식간에 불이 번졌고 열차 내부는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찼다. 22년 전 대구 지하철 참사의 악몽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이번 화재로 승객 21명이 연기 흡입과 찰과상 등 경상을 입은 것 외에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우선 28년차 베테랑 기관사의 신속한 대응 덕이 컸다. 기관사 B씨는 불이 나자 곧바로 열차를 멈추고 불이 난 곳으로 달려가 승객들과 함께 소화기로 약 20분 만에 직접 불을 껐다. 열차 안에 있던 약 400명의 승객은 수동으로 출입문을 열고 선로를 따라 긴급 대피했다. 소방 당국 관계자는 현장 브리핑에서 “소방차가 도착하기 전에 기관사와 일부 승객이 소화기로 자체 진화해 진화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불이 꺼진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B씨는 승객들이 모두 대피한 것을 확인한 뒤 화재가 발생한 열차를 마포역에서 2개 역이 지난 애오개역까지 운행한 후에야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았다.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 불에 잘 타지 않는 불연성 소재로 지하철 내부를 교체한 것도 불길이 빠르게 번지는 것을 막았다. 서울교통공사는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 전동차의 골격, 바닥재, 객실 의자를 스테인리스 등 불연성 소재로 교체했다. 서울 지하철 5~8호선도 2005년 초 내장재가 불연성 소재로 교체됐다.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엔 좌석이 폴리우레탄 등 불에 타기 쉬운 가연성 소재여서 불이 난 뒤 2∼3분 만에 열차가 화마에 휩싸였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1일 “요즘 열차 내 불이 붙을 수 있는 가연재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시민들의 차분한 대응도 피해를 막는 데 일조했다. 소방 당국에 따르면 승객들은 화재 발생 직후 열차 내 비상통화장치를 이용해 기관사에게 화재 상황을 신속히 알렸다. 일부 승객은 비상 레버를 작동시켜 문을 열고 다른 승객들이 대피할 수 있도록 했다. 서울교통공사는 열차 내에서 주기적으로 재생되는 화재 대피 안내 동영상 등 화재 대응 안내가 늘면서 시민들이 화재 발생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5호선 화재 발생 한 달 전 모의 훈련을 진행한 것도 도움이 됐다. B씨가 속한 서울지하철 영등포승무사업소는 지난 4월 29일 ‘응급조치 시범훈련’을 진행했다. 이 훈련은 각 승무사업소 주관으로 연 5회 화재나 테러 등 각종 위급 상황별 매뉴얼에 따라 대응하는 훈련이다. 매뉴얼상 기관사는 화재 발생 5분 내로 안내방송 실시·출입문 개방·승객 대피·초기진화를 수행해야 한다. 서울교통공사 관계자는 “마침 한 달 전에 ‘열차 화재’ 대비 훈련을 했다”며 “승무원뿐 아니라 역 직원들 또한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방화 용의자 A씨는 이혼 소송 결과에 불만을 품고 범행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방화 약 1시간 만인 오전 9시45분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범행 직후 여의나루역에서 들것에 실려 나오던 A씨 손에 유독 그을음이 많았던 점을 의심한 경찰이 추궁하자 A씨는 혐의를 시인했다. A씨 범행으로 지하철 1량 일부가 소실되는 등 약 3억3000만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경찰은 1일 오후 A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한웅희 신주은 기자 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