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조선, 수원역. 한 남자가 사람들에게 전도지를 나눠주며 간곡하게 말한다. “하나님은 평등하게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이거 한 번 읽어보세요.” 역사를 지키던 일본 무장 경찰에게도 전도지를 전하자 경찰은 매서운 눈으로 경멸하듯 쏘아붙인다. “어디 감히 건방지게! 조센징에게 전도하는 건 네 자유지만 일본인에겐 우리의 종교가 있다.” 남자는 미소를 머금은 채 일본어로 대답한다. “나도 일본인입니다. 일본인이기 때문에 당신에게 그리스도를 알리고 싶습니다.” 조선과 조선인을 사랑했던 일본인 선교사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무명(無名, 감독 유진주)’의 첫 장면이다.
1896년, 일본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 노리마츠 마사야스(1863~1921)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1895년)에 대한 일본인으로서의 죄책감을 안고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딘다. 그가 느꼈던 절박한 마음은 시대의 고난 속에서 복음의 빛을 전하려는 크리스천으로서의 마지막 소망이었다.
광복 80주년과 국교 정상화 60주년, 선교 140주년을 맞아 대중을 만나게 되는 영화 ‘무명’은 일제 강점기 시절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일본인 선교사들의 고백과 헌신을 그린다. 암흑 같던 조선에 단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복음이라 생각한 노리마츠 선교사는 조선인처럼 입고 마시며 수원에 동신교회를 세우고 전도 활동을 펼쳤다. 광복 후 일본 관련 추모비는 모두 철거됐지만 노리마츠 선교사의 것은 남았다. 당시 국민이 그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28년, 노리마츠 정신을 잇는 또 다른 일본인 선교사 오다 나라지(한국명 전영복)가 “지금 일본은 조선에 많은 죄를 짓고 있다. 사죄하는 마음으로 조선에 복음을 전하려 한다”며 조선행을 결심한다. 그는 신사참배 반대 설교를 해 조선의 독립을 지지한다고 의심받아 일본군에게 고된 고문까지 받았고, 1939년 강제 추방당하고 만다.
영화는 실제 관련 인물과 배우가 등장하는 등 다큐멘터리와 드라마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두 주인공이 1900년대 초 조선 복음화의 생생한 현장을 전한다면 현재 한국에서 사역 중인 나가노 마사토(장로회신학대신대원) 전도사는 암흑 같던 시기에 조선에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헌신했던 일본인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오늘의 시선으로 찾아 나선다.
“여기서 내가 죽어도, 내 이름은 남지 않을 것이다. 오직 복음만 남을 것이다.” 노리마츠 선교사의 말처럼, 그는 이름을 남기지 않으려 했지만, 그의 정신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영화는 선교사들의 실제 삶을 따라가며 그들의 고난과 믿음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배우 하정우의 담담한 내레이션은 그 서사에 대한 관객 몰입을 돕는다. 하정우가 기독교 영화에 해설로 참여한 건 독일 출신의 미국인 선교사 서서평(1880~1934)의 삶을 조명한 작품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2017)에 이어 8년 만이다. 특히 “복음만이 이 어두운 시대에 빛이 되어줄 것”이라는 차분하고도 분명한 그의 목소리는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작품 배급을 맡은 커넥트픽쳐스 남기웅 대표는 “‘이름 대신 복음만을 전하겠다’는 이들의 마음은 지금도 여전히 시대적 교훈을 담고 있다”며 “국민의 생각과 마음이 여러 갈래로 찢기고 갈등과 증오가 심화되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이들의 진심이 무엇인지 되새기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무명’은 오는 25일 전국 롯데시네마에서 개봉한다.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