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엔 생존한 전직은 물론
별세한 대통령도 줄줄이 등판
과거 유산과 진영 대결로 생긴
떡고물 노린 '게으른 정치' 탓
과거 회귀 및 편 가르기 추앙
단절해야 정치가 좋아질 것
별세한 대통령도 줄줄이 등판
과거 유산과 진영 대결로 생긴
떡고물 노린 '게으른 정치' 탓
과거 회귀 및 편 가르기 추앙
단절해야 정치가 좋아질 것
대선에서 불편했던 몇 장면이 있다. 얼마 전 천호선 전 노무현재단 이사와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 사이에 벌어진 일이 대표적이다. 천 전 이사는 “노 전 대통령이 이 후보 개인에게 특별한 덕담을 한 것처럼 거짓말을 해대 구역질이 난다. 교활하다”고 비판했다. 이 후보가 최근 봉하마을 참배 뒤 “과거 유학 갈 때 노 전 대통령이 장학증서를 주며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라고 덕담했다”고 말한 것을 비판한 것이다. 국비유학생 증서를 받은 일을 마치 특별한 개인 덕담을 들은 것처럼 자랑했다는 지적이다. 과장이 좀 섞였더라도 고인과의 인연을 좋게 기억하고 존경을 표한 것인데 구태여 ‘구역질’ 표현으로 비난할 일인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게 끝이 아니다. 이후 “박근혜 키즈인 이 후보는 노무현 정신을 입에 담을 자격이 없다”는 민주당의 비난과 “노무현 정신은 친노의 전유물이 아니다”는 이 후보의 ‘정신 소유권’ 다툼으로 이어졌다.
한덕수 전 총리가 대선에 뛰어든 뒤 보인 모습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장면이다. 그는 출마 당일 제일 먼저 광주 5·18민주묘지를 찾았다. 그런데 시민들이 참배를 반대하자 양손을 입에 모아 “저도 호남 사람입니다”라고 외쳤다. 출마 당일 광주를 찾은 것이나, 호남 출신이 ‘호남 호소인’이 된 것 모두 뜬금없어 보였다. 또 굳이 참배하러 온 이를 막아서는 건 무슨 ‘정신’에서 비롯됐을까.
김대중재단이 최근 긴급이사회를 열어 이낙연 전 총리를 상임고문에서 제명했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쓴웃음이 나왔다. 계엄을 옹호한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를 지지해 김대중 정신을 위배했다는 이유였다. 이 전 총리는 문재인정부 인사들이 모인 포럼에서도 고문직을 박탈당했다. 이 전 총리 변신도 씁쓸하지만, 그렇다고 오랫동안 한 식구로 지내온 이를 쫓아내 ‘정신 위배자’로 망신을 주는 것도 좋게 비치지 않았다.
이번 선거에서 이재명, 김문수, 이준석 후보 모두 경북을 찾아 박정희 정신을 기린 것도 못마땅해 보이긴 마찬가지다. 정치인들은 호남에 가면 김대중 정신을, 경남에 가면 노무현 정신을 기리다 언제부터인가 박정희 정신과 이승만 정신도 빼먹지 않고 있다. 고인들 업적 중에 기릴 것도 있겠지만 인공지능(AI) 시대에 너무 획일적이고 복고적인 전직 지도자 추앙이다.
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전 대통령을 ‘알현’해 눈도장 찍는 문화도 그만 봤으면 한다. 두 대통령은 옥살이까지 했고, 문 전 대통령도 공과가 나뉜다. 하지만 선거철만 되면 그들한테 같은 진영으로 인준 받으려는 이들로 넘친다. 자연인으로 놔두면 더 좋을 법한 이들을 선거판에 끌어들여 만나고 사진 찍고 밥 먹고 유리한 발언을 끌어내는 일이 이번 대선에서 절정에 달했다.
우리 정치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렇듯 전직 지도자들에 대한 과도한 향수와 이념·지역에 따른 편 가르기 정치에 너무 함몰돼 있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들과 영호남 지역을 고리로 보수와 진보로 편을 갈라 표를 얻으려는 ‘쉽고 편한 정치’만 하려는 정치인들의 욕심이 빚어낸 풍경이다. 그런 모습이 마치 앉아서 조상이 남긴 과거 유물로 관광수입만 챙기는 게으른 후손처럼 비친다.
이는 정치인과 당직자, 보좌진의 사고와 일하는 방식이 과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답습만 있고, 창의는 없다. 눈에 보이는 것, 남이 심어놓은 것만 취하려 하고 좀처럼 새롭게 진영을 넓힐 생각을 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언론의 책임도 작지 않다. 언론은 누가 대구를 가면 ‘보수의 심장’을 찾았다고 하고, 5·18민주묘지를 찾으면 ‘호남 구애에 나섰다’고 매번 판박이 같은 의미를 부여한다.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을 만나면 보수 결집이고, 문재인 전 대통령을 만나면 진보진영 통합이라 규정한다. 정치인들의 틀에 박힌 행보와 언론의 과도한 의미 부여가 그런 일들이 계속 되풀이되도록 만든다. 일부 언론은 그런 기사를 통해 진영 대립을 부추기며 지역주의 망령을 심기도 한다.
이런 풍경이 없어지게 하려면 정치인과 언론, 전직 지도자들 모두 기존 관행을 과감히 끊어야 한다. 유권자도 지역적 굴레에서 벗어나 넓은 관점에서 지지할 정치인을 찾고 지지하던 이가 잘못하면 진영을 넘나들며 더 나은 정치인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누워서 떡 먹기 식 쉬운 정치만 하려는 얌체 정치인과 편 가르기로 잇속을 챙기는 세력을 막아낼 수 있다.
손병호 논설위원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