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응당 대충 흘러간 가정의 달

입력 2025-05-31 00:38

가정의 달인 5월의 마지막 날이다. 그러면 안 되는데 왠지 모르게 후련하다. 결혼하고 매년 5월이 되면 밀린 방학 숙제를 하듯 집안 어르신을 찾아뵈며 딸이자 며느리 역할을 충실히 하려고 애썼기 때문일 것이다. 쓰고 보니 큰 수고가 아니기에 머쓱한 마음도 든다. 평소와 다르게 따로 떼 놓은 시간에 얼굴을 비치고, 약간의 용돈을 쥐여 드리는 게 전부니까.

5월이 가정의 달로 지정된 것은 1994년이라고 한다. 유엔이 세계 가정의 해를 선포하고 매년 5월 15일을 세계 가정의 날로 정하면서 가정의 역할과 중요성에 대한 인식 제고를 강조하면서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족과 관련된 기념일이 유달리 많아 5월을 가정의 달로 불렀고, 2004년 건강가정기본법 12조에 ‘매년 5월을 가정의 달로 하고, 5월 15일을 가정의 날로 한다’고 명시했다.

어른이 되고 의무나 책임이 앞서서일까. 귀찮고 후딱 해치워야 할 달로 5월을 치부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그런 마음은 사치스러운 푸념이었다. 가깝게 지내는 가족이 없어 이달에 누군가를 챙길 것도, 챙김을 받을 것도 없는 무연고자들이다. 부모와 자녀 같은 가족이 노력해 내게 주어진 것이 아니듯, 그들에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제대로 누릴 수 없는 달이었다. 최근 취재하며 만난 무연고자들은 5월을 성가시게 여긴 내 마음을 부끄럽게 했다. 새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당연한 게 아니라 은혜였다는 걸 깨닫게 해줬다.

서울 유일의 정신요양시설인 ‘은혜로운집’에 머무는 조현병 환자들을 만나고 그랬다. 오랫동안 병을 앓아온 이들은 가족에게 버려져 적절한 시기에 치료받지 못해 그곳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주일 예배에 동전을 담아낸 헌금 봉투 겉면엔 ‘엄마 아빠 보고 싶어요’라는 외로움이 적혀 있었다. 입소자 대다수는 지적장애 진단을 받았고, 조현병 하면 떠오르는 감정 조절 등 문제 행동은 없었다. 오히려 감각이 둔화해 무기력에 빠져 웃을 줄 몰랐다. 기관은 5월에 다양한 행사를 만들어 가족을 대신해 외로움을 달래주려고 노력했다. 평균 나이 60대인 입소자를 위해 어버이날 효잔치를 열었고, 동심을 찾으려고 운동회도 했다. 2009년 설립부터 지금까지 일한 한 직원은 기자에게 “운동회 날이 걱정된다”고 했다. 예전과 달리 노쇠한 입소자들이 행여 넘어질까봐였다. 직원들은 이곳에서 일생을 마치는 어르신들의 장례도 치른다.

피붙이가 아닌 형과 누나들에게 5월 특별한 하루를 선물받은 보육원 아이들도 있었다. 기독청년 단체 ‘우리들의크리스천커뮤니티’의 봉사모임 ‘우크브릿지’는 나들이가 쉽지 않은 그곳 아이들과 함께 놀이공원과 동물원에 갔다. 그냥 지나갔을 수도 있던 아이들은 봉사자들이 준비한 선물을 받으며 기억에 남을 하루를 보냈다. 수많은 날 중 그런 하루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비판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런 하루들이 모여 세상을 이겨낼 힘을 만든다고 믿는다. 보육시설 아동과 자립준비청년 지원 단체 ‘야나’의 홍보대사인 배우 신애라씨가 한 보육원에서 만난 7살 아이가 봉사에서 만난 선생님을 그려 미술대회에서 상까지 탄 이야기를 전하며 한 말처럼. “오늘 손잡은 아이에게는 그 시간이 평생의 남는 시간이 될 수도 있어요.”

응당 대충 지나쳐버린 가정의 달을 달리 봐야겠다고 다짐한다. 당연한 것을 마땅히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해서라도. 그냥 흘려보낸 5월이 누군가에겐 간절한 달이 될 수 있다. 가정의 달의 마지막 날에 칼럼을 쓰게 된 것에 감사하다. 그 덕에 10년 가까이 아픈 아버지의 뒤치다꺼리를 해준 나의 엄마, 그와 비슷한 기간 일하는 아들 며느리를 대신해 손주를 키워낸 시부모님에게 내년부턴 좀 더 특별한 5월을 선물해야지 마음먹게 되었으니까. 내년 5월이 되기 전까지 그달이 더 외로운 이들에게 따스함의 조각을 나눌 수 있는 넉넉한 품을 가진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도 덧붙인다. 글로 남겼으니 낙장불입이다.

신은정 미션탐사부 차장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