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연의 K컬처] 문화다양성, 현지화 아닌 상호 교류가 필요

입력 2025-05-31 00:00
김치, 강남스타일, BTS, 영화 기생충 등 일과성 이벤트들에 머물렀던 세계의 관심이 이제 한국문화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K컬처로 대변되는 국내외의 다양한 사회현상들, 그리고 그들의 명과 암을 사회과학적으로 관찰하고 반추해 봄으로써 한국문화의 본성을 재조명해본다.
게티이미지뱅크

서울의 한 사립대학교에서 다문화가정 출신 신입생을 대상으로 약 40억원 규모의 장학금을 제공하는 ‘다문화 인재 장학제도’를 발표했다. 이 장학제도는 부모 중 한 명 이상이 한국으로 귀화한 ‘다문화 가정’ 출신인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다. 부모의 한국 국적 취득 여부에 따라 외국인 학생의 장학금 수여가 결정되는 구조다. 어려운 타향살이에 매월 70만원이 공으로 생기는 이 기회를 마다할 이유는 없다. 다만 이 제도를 통해 소득이 생긴 부모가 이를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자식의 교육을 위해 당신도 한국으로 귀화하라 권할지는 의문이다. 기사 위 기념사진에 담긴 수혜 학생들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인재로 뽑혀 장학금을 받는 아이들의 얼굴치고는 이상하리만치 차분하다. 부모의 국적으로 받는 장학금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헤드라인에 함께 놓인 ‘다문화’와 ‘인재’ 두 단어가 필자에겐 매우 억지스럽게 느껴진다.

올해에도 한식 클래스에 참여한 외국인 학생들은 불고기와 떡볶이를 만든다. 도자기 체험과 한복 입어보기도 학생들 사이에서 반응이 좋단다. 대부분의 대학교에서 외국인 신입생들을 위해 제공되는 프로그램들이다. 엑티비티 자체가 재미있기도 하고, 특히 이들의 현지화에 도움이 된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에는 주로 한국 학생과 유학생이 팀을 이루어 함께 참여하는데, 한 가지 의아한 것은 문화의 전수가 지극히 일방향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대중교통이나 기숙사 시설 이용법을 알려주는 것과는 다르다. 처음 한국 생활을 시작하는 그들도 그들의 전통음식이나 놀이를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있고, 또 그 과정에서 새로운 제3의 문화가 튀어나올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을 현지화의 대상으로 여길 뿐, 문화를 공유하는 동반자로 인식하지는 못하는 듯하다. 그들이 여기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는 이 시간을 배움과 새로운 발견의 기회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유명 유튜버인 한 석학(碩學)이 캐나다의 23대 총리 트뤼도(Justin Trudeau)의 취임식을 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고백한다. 당시 세간의 미움을 독차지하던 이슬람계 사람뿐 아니라, 장애인, 그리고 다수의 여성을 장관으로 임명하여 대의민주주의를 실천에 옮겼다는 것이 이유다. 그는 종의 다양성(biodiversity)이 높은 생태계일수록 저항력과 회복탄력성이 높다고 설파했는데, 같은 현상이 사회문화에도 공히 적용될 수 있음을, 즉, 문화다양성이 높은 사회일수록 유연하면서도 활력이 넘칠 것이라는 직감에도 확신을 가진 듯했다. 하지만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의 2007년 데이터는 이러한 전제를 부정한다. 인종 다양성이 높은 곳일수록 서로에 대한 불신과 편견은 깊어지고 타 인종 간 소통은 줄어든다. 또한 인위적인 쿼터 시스템의 도입은 거의 항상 권력이나 혜택이 집중되는 곳에만 한정되어 왔다. 공사 현장에서 벽돌을 나르는 인부의 거의 99%는 남성이지만 여기에 양성평등이나 여성할당제를 주장하는 이는 본 적이 없다.

‘문화에도 높낮이가 있을까’라는 물음에 학생들은 대뜸 ‘아니오’를 누른다. 중고등학교 때 학습했던 문화상대주의적 사상이 그들의 머릿속에 디폴트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문화상대주의가 주장하는 요지는 대략 이렇다. 각 문화는 이를 채택한 사회의 독특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삶의 방식이므로, 일정한 기준에 따라 그 우열을 비교할 수 없다(‘비교해서는 안 된다’가 이를 옹호하는 이들의 주장에 더 가까울 것이다). 따라서 타문화에 대해 가치판단을 내리는 행위는 편협한 자문화중심적 사고가 체화된 것이며, 이는 사회적으로 억제되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문화다양성이 유지, 확대되며 인류의 삶은 더 풍요로워진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현실과는 괴리가 커 보인다. 이민의 비대칭성이 그 근거다. 세계의 모든 문화가 질적으로 같다면, 또 각 국가의 제도와 체계가 그들의 문화와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면, 인구의 이동은 무작위적으로 발생해야 맞다. 인구의 유입이나 유출이 특정 국가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민의 방향은 실제 뚜렷한 비대칭성을 보인다. 오늘도 지구인은 경제적 자유와 신분 상승의 기회, 가족의 건강과 행복, 정의와 형평성, 제도의 투명성과 같은 인류 보편적 욕구와 개인주의적 가치를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나라로 열심히 이동 중이다.

지난 5월 21일은 유네스코(UNESCO)가 제정한 ‘세계 문화 다양성의 날(World Day for Cultural Diversity for Dialogue and Development)’이다. 이에 기초가 되는 ‘문화다양성에 관한 보편선언(Universal Declaration on Cultural Diversity)’은 앞서 설명한 문화상대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특히 DEI(Diversity, Equity, Inclusion), 즉 다양성 자체에 대한 존중과 형평성, 그리고 포용성을 강조하고 있다. 위에서 나열한 사례들과 이에 대한 반박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필자는 이와 상반된 식견을 가지고 있다. 문화는 보편적인 기준에 의해 가치평가가 가능하며, 의미있는 문화다양성은 사회참여자들의 의지에 의해 자연발생하는, 인위적인 쿼터시스템 따위로는 달성할 수 없는 고차원적 개념이다. 인종이나 민족적 정체성에 기반한 특혜는 이를 시행하는 이의 정치적 입지를 위한 것일 뿐이며 사회의 통합보다는 분열과 감시를 초래하기 쉽다.

문화상대주의는 타문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관점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문화를 비판 없이 동등하게 인정하자는 상대주의는 때로 구조적 차별이나 인권침해를 묵인 혹은 정당화하거나 윤리적 판단을 회피하게 만든다. 특히 교육의 영역에서 이러한 접근은 학생들로 하여금 가치판단을 유보하는 습관을 조성하고, 옳고 그름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모든 것은 다문화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순진한 태도를 고착시킬 수 있다. 인권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기초적인 인간의 욕구이며, 최소한 이를 기준으로 문화의 높낮이는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상대주의를 옹호하다가도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집단으로 이루어지는 여아(女兒) 할례의식이나 축제기간 중 여성에 대한 집단 성폭행을 묵인하는 관습을 그저 ‘다양성’의 이름으로 수용해야 할지 물었을 때 비로소 학생들은 주춤하며 생각을 시작한다. 비판적이고도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지성이 움트는 순간이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에서는 최근 하버드에 지원하던 60억 달러 규모의 연방 보조금을 중단했는데, 이는 학교에서 입학이나 고용 과정에서 인종을 고려하는 정책을 지속한 데 따른 조치였다. 미 국립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을 포함한 굵직한 국책 연구지원기관 역시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 연구비 지원 기준에 특정 성별이나 인종적 배경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용? 좋다! 하지만 포용의 기준이 후천적인 노력이나 의지로 극복할 수 없는 생물학적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 더욱이 학술연구계에 인종다양성을 강제하는 쿼터 시스템은 그 논리적 근거를 찾기 어렵다. 부모의 귀화를 조건으로 한 한국 대학의 사례는 그나마 조금 낫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이는 의도했던 포용이나 통합이 아닌 사회분열의 발단으로 귀결될 확률이 더 높다.

기능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문화다양성은 동일한 문제해결을 위한 서로 다른 접근법, 혹은 독특한 아이디어의 총합이다. 문화적 이질성이 클수록,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도 서로 다르게 마련이며, 따라서 문화다양성이 높은 사회일수록 문제해결을 위한 수단도 늘어난다. 여기에 각기 다른 관점들이 조합될 수 있는 경우의 수까지 고려하면 그 사회의 지적 잠재력은 실로 그 한계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 다만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문화간 소통이 필히 수반되어야 한다. 대학 캠퍼스만 해도 수치적 문화다양성은 이미 달성한 지 오래. 허나 같은 종족들끼리 서로 뭉쳐 다닐 뿐(ethnic clustering), 인종 간 커뮤니케이션은 여전히 드물다. 문화다양성 그 존재 자체는 실질적인 의미가 없다. 문화와 인종을 넘나드는 대화와 담론이 거침없이, 또 쉼 없이 이어질 때 우리 사회는 진정 더 성숙하고 풍요로울 수 있다.

불고기와 떡볶이는 그만하자. 그들과 함께 훠궈와 쌀국수, 보르쉬(Борщ: 러시아식 수프)와 보즈(Бууз: 몽골식 찐만두)도 만들어보자. 의미있는 대화와 진정한 문화다양성은 그렇게 시작된다.

광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겸 한국문화데이터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