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못 할 고통 닥치는 순간
함께 나눌 소중한 가족·이웃
이제 사회 안에서 분담하길
함께 나눌 소중한 가족·이웃
이제 사회 안에서 분담하길
얼마 전 한 교회의 예배에 초대받았다. 알츠하이머인 아버지와 동행하는 삶을 신학 언어로 담아낸 책을 출판했는데, 그 이야기를 ‘돌봄’이라는 제목으로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예배가 끝나자 40대 중반의 여성이 다가오더니 대뜸 질문을 던졌다. “버리고 싶은 가족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그의 절박한 얼굴에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어떤 가족인가요?”라고 물었다.
그는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겪고 있는 아들이라고 답했다. 사회적 상호작용과 의사소통이 어려운 이 질환은 공공장소에서 특정 행동을 반복하거나 특정 사물에 집착하기도 하는데, 꾸준한 치료의 도움을 받아도 증상이 평생 지속될 수 있다.
장애 자녀를 둔 부모의 어려움을 짐작하기에 ‘아들을 버리고 싶다’라는 끔찍한 말에도 나는 어떠한 도덕적 비난을 말과 표정에 담아낼 수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 겪어온 돌봄의 헌신과 압박 앞에 자녀를 돌볼 의무와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거나, 신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연단한다는 말도 쉽게 건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치매 환자인 아버지도 자폐스펙트럼과 거의 같은 증상을 겪고 있기에 그 고단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당신의 고통을 충분히 잘 안다고 나는 쉽게 말할 수 없었다. 신이 정해 준 생명의 시간표가 제대로 작동하는 ‘은총’이 우리에게 내린다면, 내가 겪는 돌봄의 고통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종료될 것이지만 그의 고통은 삶 끝까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서양 학문 중 가장 오래된 ‘신학’이라는 학문은 ‘신에 대한 앎’을 탐구한다. 그러나 인간이 신을 탐구하고자 열망할 때 그 열망이 정직하다면 “왜 신은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지속하는가? 왜 그는 침묵하는가?”라는 물음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많은 이들이 그런 고통에 처하지 않도록 정성을 다해 기도하며 종교 생활을 한다. 하지만 그 공로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아니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닥치는 때가 있다. 이해만 할 수 있어도 고통을 견디는 힘이 좀 생기련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저 바닥에서 오는 고통이 나에게, 우리 이웃에게 생긴다.
그럴 때 신에게 처절하게 따질 수밖에 없다. “왜 나여야 합니까? 나는 더 이상 살 힘이 없습니다.” 이 불경스럽고 불신에 휩싸인 질문 앞에 스리랑카의 공학자이자 신학자이며 ‘오직 고통당하는 하나님만이’의 저자 비노스 라마찬드라는 탄식과 분노의 언어를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던지는 이에게는 역설적으로 정의롭고 선한 궁극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살아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모든 노력과 공로가 결국 무의미해지는 것을 체험하는 순간에도 깊은 좌절로 말을 잃기보다 여전히 탄식과 분노를 표현하는 이들에게는 삶의 의미를 찾고 생을 지키려는 근원적인 힘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홀로 감당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고통은 사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그러니 고통에 버거워하는 이를 위해 그 짐을 잠시 맡아주고, 또 함께 들어줄 수 있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가족애나 우정, 이웃사랑도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움직인다. 그러나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면 지혜를 피어나게 하는 또 다른 동력은 ‘정치’다.
아니, 정치 그 자체가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짊어져도 해결되지 않는 고통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확하다. 어떻게 고통을 함께 나눠 질 수 있는 정치를 만드느냐는 결국 ‘가족’과 ‘이웃’이면서 동시에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자신과 이웃의 고통으로 신 앞에 정말로 제대로 탄식하며 분노할 수 있는 이라면 고통을 함께 나누는 세상의 정치에도 바른 책임을 다할 수밖에 없다. 아직은 그것이 우리가 홀로 고통의 짐을 짊어지고 가는 자의 질문에 응답할 수 있는 미완의 답이다. 투표는 그 책임을 확인하는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이다.
김혜령
이화여대 부교수
호크마교양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