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예술고를 졸업하고 거듭남의 체험을 한 후 이듬해에 서울대 음악대학 국악과 작곡 전공으로 입학해 음대 교수가 되려는 꿈을 키워갔다. 사실 나는 국악을 전혀 알지 못했고 흥미도 없었다. 내가 서양음악 작곡과를 택하지 않고 국악과를 지원한 이유는 오로지 음대 교수가 되려는 인간적인 계산 때문이었다.
국악은 양악과는 다른 생소한 음악이었다. 그 분위기를 익히느라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작곡하는 일은 즐거웠다. 나는 이성천 선생님의 지도로 국악기와 서양악기를 넘나들며 여러 가지 실험적 작품을 만들었다. 그때 작곡한 작품 중에는 ‘만삭’ ‘슬픈 잉태’ ‘탈선’ ‘전통과 현대’ 등이 있었다.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 당시 국악계의 정통 국악인들 사이에서 이단아로 불릴 만했다.
지도교수인 이 선생님은 본래 의과대학에서 공부하다가 국악으로 전향한 분이셔서 실험정신이 강했다. 그는 “네가 서양음악을 공부하고 국악 작품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다면 국악만 한 사람보다 훨씬 더 신선한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나를 격려해 주셨다. “국악이 발전 없이 옛것만 고수한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음악 취급을 받으며 외면당할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 강조하셨다. 선생님이 미국에 가셨던 한 학기 동안에는 작곡과 강사로 출강하던 윤양석 선생님에게 작곡 지도를 받았다.
3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이었다. “문성모, 너 이번에 동아콩쿠르 한번 나가봐.” 이 선생님의 권유로 나는 그해 가을 우리나라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동아음악콩쿠르’에 도전했다. 그해 국악작곡부 지정곡은 거문고 독주곡이었는데, 나는 ‘부활(復活)’이라는 작품을 제출해 2등으로 입상했다. 이는 음악가로서 나의 정체성을 확실히 굳히는 사건이었고 음대 교수가 되겠다는 비전에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서는 기회가 됐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부활은 기독교적인 것을 소재로 한 첫 번째 국악 작품이었다. 서울대 음대에 입학한 것과 동아콩쿠르 입상은 모두 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요, 전적인 주님의 은혜 안에 이루어진 기적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만한 실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고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학에서 국악을 배운 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섭리라고 생각한다. 그 덕에 서양음악과 더불어 국악에 대한 지식과 이해의 폭을 넓혔으니 말이다. 당시 불교음악 무당음악 정도로 인식됐던 국악이 얼마나 종교적이고 철학적이고 품위 있는 음악인가를 배우면서 “이런 훌륭한 음악을 내가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구나”하는 자책감마저 들었다.
그때까지 나의 인생 계획은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한 후 졸업하고 음대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에는 국악 전공으로 서울대 음악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학에 교수로 임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나의 길과 달랐고 하나님의 뜻은 나의 뜻과 일치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버지의 서원 기도에 응답하시고, 나를 음대 교수가 아닌 목사로 이끄셨다.
정리=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