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수출 한국… ‘수출지·산업·공급망’ 대전환으로 위기 극복

입력 2025-05-27 19:03

자유무역 시대의 승자였던 한국이 트럼프발 강력한 보호무역주의 시대에서 살아남으려면 수출지·산업·공급망의 3대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전문가 진단이 나왔다. 통상전쟁 속에서 각국이 기업·산업·정부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는 만큼 한국 새 정부도 적극 재정을 집행해 산업경쟁력을 뒷받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27일 ‘새 정부에 바란다: 통상전쟁 시대 기업의 생존전략’을 주제로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에서 ‘2025 국민성장포럼’ 패널토론이 진행됐다. 토론에는 신동석 포스코경영연구원 경제정책연구센터장,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정기옥 대한상공회의소 여성기업위원장이 참여했다.

전문가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의 고관세 정책의 파장이 단기에 그치지 않을 것으로 봤다. 장 원장은 “미국 관세 확대 목적은 무역 적자를 줄이고 타국 시장을 개방하려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가 경제안보 달성과 중국을 배제한 공급망 구축을 위해 자국 내 첨단 제조업 유치를 추진하는 가운데 관세 카드를 핵심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분석이다. 신 센터장은 “트럼프 행정부 정책은 단기적인 불확실성을 넘어 중장기적인 글로벌 공급망의 변화를 촉발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될 것이란 우려도 나왔다. 신 센터장은 “국내 산업은 고임금, 고에너지 비용 부담에 저가 중국산과의 출혈경쟁으로 이미 빈사 상태”라며 “국내 기업이 미국이 원하는 대로 첨단산업 핵심 공장을 이전할 경우 내수시장은 한계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장 원장은 “미국 수입업체들이 관세 비용을 수출업체들에 떠넘기려 하고 있다”며 “우리 기업이 관세 비용을 부담하기 위해 수출가격을 낮추면 자칫 반덤핑 제소를 당할 수도 있어 더욱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영세 중소기업이 입는 타격은 더 크다. 정 위원장에 따르면 관세전쟁 속 중소기업들은 납품 물량 감소, 수익성 악화, 가격경쟁력 하락 등의 문제를 호소하고 있다. 그는 “경기도 의정부의 의류 업체, 부산의 해산물 가공 업체 등 전국의 수많은 기업이 해외로부터 거래처 변경, 거래 중단 등을 통보받고 있다”며 “중소기업들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고 전했다. 대기업이 생산기지를 해외로 옮김에 따라 중소 협력업체들의 추가 타격 역시 우려된다. 장 원장은 “자동차·철강·반도체 등 전후방 연계가 큰 주력산업에 대한 품목별 관세는 중소 협력업체로 피해를 확산시킬 것”이라고 예상했다.

관세 대응 차원에서 미국 현지 생산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도 쉽지 않다. 신 센터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오락가락 정책에 미국의 정책 불확실성이 너무 커졌다”며 “미국의 약탈적인 행태가 조금 가라앉은 뒤에야 기업들이 투자 의사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 위원장은 “자동차산업의 경우 1차 벤더(하청) 정도나 해외 진출을 고민해 볼 수 있지, 2차 벤더 이하 수천개 업체는 이마저도 불가능하다”며 “폐업조차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매각처도 찾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기업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는 하소연을 자주 듣는다”고 말했다.

정 위원장은 수출기업을 위한 한국은행의 저금리 무역금융 자금을 현재 1조5000억원에서 3조원으로 확대하고 금리는 1.5%에서 1.0%로 낮출 것을 제안했다. 미국 관세 조치로 피해를 입는 기업의 피해 보전을 위해 4000억원의 긴급자금을 공급하고 4조2000억원의 ‘위기극복 특례보증’을 신설하는 내용의 재정 지원도 제안했다.

전문가들은 관세를 올린 미국 시장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유럽·동남아시아 등 제3국 시장으로의 수출지를 다변화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정 위원장은 “중소기업 혼자서는 수출시장 다변화 및 신시장 개척 지원이 어려운 만큼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장 원장은 “공급망을 이중으로 구축해 미국에 수출하는 제품에는 중국 외 지역 원재료를 사용하고, 기타 지역에 수출하는 제품에는 가격과 공급 안정성을 고려해 조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장 원장은 기업들에 공급망 관리에 더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당부했다. 그는 “이번에 타결된 미·영 간 협상 과정을 보면 미국 정부가 중국 자본의 영국 진출을 경계하고 중국 기업이 영국을 우회 수출기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강도 높은 요구를 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며 “멕시코 등 제3국에 진출하는 우리 기업들도 원산지 관리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업 지원을 강화하는 주요국처럼 보조금·세금 혜택을 늘려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신 센터장은 “재정 균형 목표를 강조했던 독일이 올해 10년 기간의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내놓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며 “유럽연합(EU) 내부에서도 산업경쟁력을 잃어버렸다는 반성이 나오며 투자 확대, 재생에너지 전환 속도 조정 등의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를 위해 한국 역시 재정건전성 목표를 앞세우기보다는 기업과 정부가 뭉쳐 과감한 투자에 나서야 한다는 조언이다. 신 센터장은 “한국 업체들도 투자와 첨단기술 부족으로 중국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며 “EU처럼 10년 뒤 미래를 내다보는 ‘한국판 경쟁력 보고서’를 만들고 인공지능(AI)·반도체·배터리 등 첨단기술에 재원을 집중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준식 기자 semipr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