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전력투구’ 시대… 전력 멈추면 끝난다

입력 2025-05-29 02:12
게티이미지뱅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23일(현지시간) 미국의 원자력 발전 용량을 오는 2050년까지 4배로 늘리고 원전 관련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스위스·이탈리아·덴마크·스웨덴 등 수십년 동안 ‘탈(脫)원전’을 외치던 유럽 주요 국가가 최근 연달아 탈원전 정책을 폐기한 데 이어 미국도 원전 확대 기조를 천명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 세계가 전력을 만드는 주요 발전원으로 원전을 재조명하는 것은 원전이 지닌 단점이 갑자기 사라져서일까. 아니다. 인류의 예상보다 빠르게 개화한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값싸고 안정적인 전력을 풍부하게 확보하는 것이 국가 제조업 경쟁력의 핵심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신동석 포스코경영연구원 경제정책연구센터장은 지난 27일 국민일보 주최로 열린 ‘국민성장포럼’에서 “유럽이 재생에너지 전환 속도를 늦추기로 정책을 후퇴한 것은 미국·중국과 경쟁하려면 에너지 비용 절감이 필수인 시대가 됐기 때문”이라며 “우리도 새 정부가 들어서면 제조업의 에너지 비용을 줄이기 위한 탈탄소 일정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안정적 전력 공급 없이 AI 강국 실현 불가능

6·3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김문수 국민의힘 대선 후보 모두 경제 정책 핵심 공약으로 AI 강국 실현을 내세웠다. 하지만 AI 데이터센터 등 인프라를 뒷받침할 전력을 어떻게 공급할지에 관한 청사진은 제시하지 않았다. 지금의 전력망과 전기요금 체계로는 제조업 경쟁력 강화도 AI 강국도 먼 나라 이야기라는 게 산업계의 중론이다.

최근 3년간 국내 산업용 전기요금이 급등하면서 제조업 경쟁력에는 이미 ‘빨간불’이 켜졌다. 산업용 전기요금은 2021년부터 총 7차례 올랐다. 누적 상승률은 약 68.7%에 달한다. 특히 전력 다소비 업종인 철강·화학·반도체 기업은 급격히 오른 전기료 탓에 생산원가 부담이 심화하는 양상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AI 시대가 도래하면서 전력 수요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정부가 확정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에 따르면 AI 데이터센터와 전기차 확산,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등으로 인해 2038년 국내 최대 전력 수요는 128.9GW에 이를 전망이다. 이는 현재 여름철 최대 수요 대비 약 30% 늘어난 수준이다. 급증하는 수요를 안정적으로 충당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전기를 만들지’ 발전원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각 발전원의 정산단가를 기준으로 보면 경제성이 돋보이는 발전원은 원자력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원자력은 kWh당 약 60~70원이다. 반면 태양광은 123~144원, 육상풍력은 166~168원, 해상풍력은 271~300원 수준이다. 원전은 재생에너지뿐 아니라 석탄,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에 비교해서도 발전 비용이 가장 저렴한 전원이다. 이에 윤석열정부는 탈원전 기조를 완화하고 원전 활용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했다. 혁신형 소형모듈원자로(SMR) 개발을 내년까지 완료할 계획이며 노후 원전의 계속운전 심사도 본격화하고 있다.


문제는 국가 에너지 정책이 정권마다 부침을 겪었다는 사실이다. 산업계에서는 에너지 정책의 정치화를 지양하고 정권이 바뀌더라도 일관성 있는 정책 추진을 절실히 바란다. 또 연이은 전기요금 인상으로 제조업의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친환경적 재생에너지와 함께 원전·액화천연가스(LNG) 발전 등을 병행하는 ‘에너지 믹스’ 전략을 재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에너지 정책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그나마 반가운 변화의 조짐도 엿보인다. 이재명 후보는 지난 24일 전북 새만금 재생에너지 현장 간담회에서 “(원전과 재생에너지를) 상황에 따라 필요한 만큼 안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밝혔다. 산업계에서는 에너지 믹스를 이념이 아닌 현실적 관점에서 보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풀이하며 반색했다.

한국 전력망, 스페인式 정전 막을 수 있을까

전력 수급 조절이 어려운 ‘경직성 전원’이 계속 늘고 있다는 점은 한국을 포함해 세계가 공통으로 지닌 문제 중 하나다. 경직성 전원이란 갑작스럽게 출력을 높이거나 줄이기 어려운 전원을 뜻한다. 주로 원자력과 석탄처럼 장시간 일정 출력을 유지하는 발전 방식이 해당한다.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도 발전량이 날씨에 따라 급변해 출력 제어가 어렵기 때문에 계통 운영 측면에서는 유사한 부담을 주는 전원으로 분류된다. 반대로 ‘유연성 전원’은 수요나 공급 상황에 맞춰 빠르게 출력을 조절할 수 있는 발전원으로 LNG 복합화력이 대표적이다.

LNG를 무작정 축소하려는 에너지 정책은 계통 안정에 적신호를 보낸다. 업계에서는 실시간 전력 수요 대응 등이 가능한 LNG 발전의 역할이 전력망 안정성 유지를 위해 필요하다고 본다. LNG 발전은 정지 상태에서 재가동까지 1~3시간이 걸려 원자력(24시간) 석탄(12시간) 등에 비해 실시간 전력 변화에 대응할 수 있고 재생에너지처럼 날씨의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LNG 발전을 화석연료 기반 전원에서 수소 등 무탄소 전원으로 넘어가는 데 있어 ‘브릿지 연료’로 활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실제 스페인도 정전 복구를 위해 LNG 복합화력과 수력 발전소를 긴급 가동했다. LNG 발전이 재생에너지나 원전의 단점을 완충하는 유일한 유연성 전원이라는 견해가 존재하는 이유다.

그러나 11차 전기본은 LNG 발전의 비중을 중장기적으로 축소하는 방향으로 설계됐다. 2030년까지는 LNG 발전 비중을 현재 29.8%에서 25.1% 수준으로 유지한다는 계획이지만 2038년에는 10.6%까지 낮추는 로드맵이다.

김혜원 기자 ki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