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높은 곳에 있는 이들을 기억하기

입력 2025-05-28 00:35

사진작가 노순택 전시 막는
시의원의 주관적인 '필터링'
문화는 권력의 장식이 될 뿐

사진작가 노순택은 내가 비평가로서 집요하게 추적하는 대상이다. 사진에 대해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던 2010년 이후, 나는 노순택에 대한 비평문 예닐곱 편과 인터뷰 한 편을 썼다. 몇 편을 썼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에 대한 글을 마무리할 때마다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쓴 글을 다시 읽어보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도 유독 노순택에 대한 글들은 다시 열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하드디스크에 고스란히 넣어두곤 한다.

이는 노순택과 그를 둘러싼 예술과 정치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나의 비평적 목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적 주제 의식과 미학적 독특함, 무엇보다도 뒤틀린 윤리적 강박을 지닌 작가다. 당면한 사회 현상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려는 집착, 부조리를 알리고 사회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투지, 가장 예리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사진적 기량, 그럼에도 자신의 실천과 사진 이미지의 한계를 의심하는 성찰이 그에게는 있다. 그는 폭력의 현장을 촬영하면서도 그 장면이 지닌 기묘한 연극성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사회적 고통을 기록하면서도 자신의 카메라가 오히려 현실을 왜곡할 수 있다는 점을 끊임없이 질문한다.

지난달 김형재 서울시의원은 의회 업무보고에서 서울시립미술관 광복 80주년 기념 전시 ‘서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에 노순택의 작품이 포함됐다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광복 80주년 기념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그의 발언이 실린 기사는 지금도 김 의원 홈페이지에 게시돼 있다. 정치인이 자신의 특정한 해석을 바탕으로 예술 작품을 배제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의 발언은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훼손하는 심각한 문제다. 김 의원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넘어 민주주의 사회의 공론장 구조 자체를 공격하고 있다.

김 의원이 문제 삼은 것은 노순택의 ‘얄읏한 공’ 연작으로, 미군기지 확장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평택 대추리 주민들의 기억과 풍경을 담았다. 문제는 김 의원이 ‘반미 정서 유발’ ‘반정부적 해석 가능성’을 들어 전시에 부적합하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예술 작품은 본질적으로 다의적이며, 사회적 기억과 역사적 해석을 재구성하는 장으로 작동한다. 80년의 세월을 기억할 때 영광된 서사만 담아야 한다는 주장 자체가 역사 해석의 다원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국가 폭력의 기억과 사회적 갈등의 층위를 지우려는 시도는 문화행정이 가장 경계해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특히 서울시립미술관과 같은 문화예술기관은 기념을 통해 과거를 회고하는 동시에 현재를 성찰하는 비판적 장소로 기능한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서사와 기억이 충돌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긴장을 감내하고 조율하는 것이 공공 미술관의 책무다. 반면 행정이나 정치권력이 자신들의 ‘적절성’을 기준으로 예술을 필터링하고 배제하려는 순간 문화예술기관은 정치의 하위 장치로 전락한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불편한 예술을 공적 장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한 작가의 전시권을 침해하는 것뿐 아니라 시민 전체의 감각과 사유의 공간을 훼손하는 행위다. 노순택의 사진은 고통의 풍경을 미학적 논쟁으로 변환하는 독특한 정치성을 지닌 작업이며, 오히려 공적 기념과 국가 기억의 논리가 실패하는 자리에서 ‘광복’이라는 개념을 비판적으로 갱신한다. 이러한 질문이 배제되는 순간 문화는 권력의 장식이 되고, 평택 대추리 주민들의 고통과 기억은 갈 곳을 잃는다.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전쟁의 프레임들’에서 사회가 특정 집단의 고통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공적 애도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현상을 지적한다. 어떤 이들은 열심히 말하고, 울고, 손을 들고, 피땀어린 논밭을 지켜내기 위해 어깨걸이를 하더라도 선거라는 ‘민주주의의 꽃’에 가려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한 명의 시의원이 쉽게 배제를 이야기하는 노순택과 그의 동료들이 아니었더라면 사회적 기억과 애도의 폭과 깊이는 지금보다 훨씬 좁고 얕았을 것이다.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