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지 않은 삶이었지만, 부끄러움을 알고 자신을 성찰하며 살아가려 했던 청년이 있었다. 이름도, 언어도, 꿈도 허락되지 않았던 상실의 시대. 청년은 별처럼 흩어진 마음의 조각을 그러모아 낱말을 만들고, 그 낱말을 엮어 은하수처럼 빛나는 시를 지었다. 다정하고 섬세했으며 강직하고 순수했던 시인의 영혼은 태어난 지 스물일곱 번째 해에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시인과 나의 우연한 만남은 대략 15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당시 나는 도쿄 이케부쿠로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인근에는 교정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릿쿄 대학이 있어 점심을 먹거나 산책을 할 때 즐겨 찾곤 했다. 서늘한 공기를 가르며 유유자적 걷던 어느 가을날, 교내 전시관에 발길이 닿았고 그곳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장면을 마주했다. 시인의 육필 원고 여러 편이 일본어 번역본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내가 청춘의 푸르름을 만끽하며 걷던 교정은 오래전 그가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던 곳이었다. 뭐라 설명하기 복잡한 감정이 가슴에서 손끝까지 퍼져 나갔다. 남의 나라 6첩 방에서 숨죽이며 써 내려간 시들은 마치 내가 미래에서 온 사람인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세상이 그의 생에는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시인은 홀연 우리 곁을 떠났고, 지켜주지 못한 꿈과 열망과 그리움만이 빛바랜 종잇장에 서렸다. 타국에서, 유리 상자 안에 봉인된 채 영영 아침을 기다린다. 그날 이후로 산책을 할 때면 어김없이 시인의 육필 원고 앞에 섰다. 그리고 매번 애처로움에 치여 발길을 돌렸다.
시인이 겪었을 무자비한 세상도, 은행나무 노란 잎이 우수수 떨어지던 그 시절의 기억도 점점 환영처럼 아득해진다. 시대처럼 온 아침을 살아가는 나는 그의 시집을 책장에서 꺼내 머리맡에 둔다. 올해는 윤동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함혜주 이리히 스튜디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