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촉망받는 이공계 인재들은 왜 조국을 등지고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까. 전문가들은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당장 개선해야 할 점은 명확하다고 입을 모았다. 일자리 확충과 석박사가 걱정 없이 연구할 수 있도록 지급되는 충분한 연구비, 지도교수의 제왕적 권력으로 대표되는 연구실 문화 개선이 시급한 과제로 지목됐다.
오경수 중앙대 약학대학 교수는 26일 “대학원에서 연구를 마친 과학자들이 갈 수 있는 자리가 확실히 부족한 상황”이라며 “정부나 기관이 일반 기업에 억지로 일자리를 만들라고 강요할 수 없는 진퇴양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에서는 10만 인공지능(AI) 전문가 양성 등을 말하는데 현장에서는 유용한 정책이 아니라고 본다”며 “대학이나 연구소 같은 실질적으로 연구직을 수용할 수 있는 기관에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인재에 대한 투자가 교육기관에 대한 예산 지원을 넘어 안정적이고 확실한 일자리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이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인건비를 해외 수준으로 맞춰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김명주 서울여대 정보보호학부 교수(AI안전연구소장)는 “외국은 석사든 박사든 연봉 개념이 있는 반면 한국 대학원생의 생활은 교수의 연구비에 좌지우지된다”며 “대학원생이 교수 지원 없이도 최소한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저임금 보장이 필요하다. 기본수당처럼 대학원생들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비가 주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최병호 고려대 인공지능(AI)연구소 교수 역시 “연구는 아무리 짧아도 3년, 길게는 10년 이상 진행되는 경우가 많은데 연구비 지원이 부족하면 학생들이 생계가 어려운 상황에 봉착한다”며 “해외 대학이나 기관에서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면 국내 대학원생 입장에서는 당연히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현재 연구비 지원 기준인 실적 기반 체제를 과감하게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김 교수는 세계 최초로 AI·딥러닝 연구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캐나다 토론토대 예시를 들며 “캐나다 정부는 이 분야에 대한 아웃풋이 없어도 10년, 20년 꾸준히 지원을 해줬다. 중국 현지 연구진이 개발에 성공한 딥시크도 10년 넘게 차곡차곡 투자를 쌓아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한국은 연구과제 수주 대상자를 정하는 기준이 철저히 과거 실적에 맞춰져 있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최 교수는 “교수들이 연구과제를 따내기 위해 예상되는 성과에 맞춰 연구 주제를 정하다 보니 정작 연구가 더디게 진행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며 “성과 지표에 모든 걸 맞추다 보니 연구 성공률 자체는 매우 높은 편이다. 하지만 원래 하고자 했던 연구가 아닌, ‘보고용’ 연구를 따로 만들어내는 것은 자원 낭비”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이렇다 할 연구 성과나 실적이 나오지 않더라도 그 분야가 원천기술이나 기초과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정부 차원에서 꾸준히 투자해야 한다는 얘기다.
연구실 내에서 지도교수에게 주어진 제왕적 권력을 인위적으로 분산시키는 것도 이공계 인재 확보 해법 중 하나다. 최 교수는 “한국은 해외와 달리 인사와 예산에 대한 권력이 모두 교수 한 명에게 집중돼 있다”고 지적했다. 해외의 경우 인사권은 교수에게 남겨두는 반면 예산권은 독립적인 외부 기관이 집행하는 경우도 있다. 최 교수는 “지도교수 한 명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제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나친 불이익을 줄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된다”며 “학계 전체의 합의를 끌어내기 쉽지 않겠지만 혁신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대학원생의 불안정한 지위를 그나마 보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권에 따라 뒤바뀌는 연구·개발(R&D) 정책에 대한 깊은 우려도 나타냈다. 오 교수에 따르면 윤석열정부 3년간 증발한 개인 기초연구 과제만 6000~8000개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과제 하나에 교수와 연구자, 대학원생 등 3~4명이 참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난 정부 임기 동안 최소 1만명의 과학자가 연구 기회를 잃은 셈이다.
이런 폐해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적어도 과학 교육을 관장하는 기관만큼은 정권에 좌우되지 않도록 강력한 권한과 독립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온다. 김 교수는 “정부가 바뀔 때마다 교육부 정책이 바뀐다는 비판이 있어 3년 전 국가교육위원회가 출범했지만 이조차도 정권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며 “헌법재판소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준하는,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독립적인 교육정책 전용 기관을 설립하는 방안까지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R&D 예산이 복원된 이후에도 연구비 부족을 호소하는 과학기술 연구자들이 여전히 많다는 국민일보 보도에 대해 “정부 R&D 투자 중 10% 이상을 기초연구사업에 투자하고, 안정적인 지원 규모를 확보하는 등 기초연구의 질적 고도화를 위한 정책을 본격 추진할 계획”이라며 “연구 생태계 확충을 위해 차별화된 대학 단위의 새로운 지원체계 도입 여부 등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공계 인재 이탈이 심화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해외 체류 박사후 연구원의 국내 복귀 프로그램 신설 등을 주요 과제로 추진하겠다”며 “논의된 정책 대안을 속도감 있게 구체화해 내년도 예산 편성 단계부터 적극 반영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김지훈 윤준식 기자 germa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