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실용외교와 낙관론의 경계

입력 2025-05-27 00:33

동맹파·자주파 갈등 터지고
美와 인식차 컸던 노무현정부

‘한반도 운전자론’ 강조하다
트럼프 거부에 막힌 문재인정부

미·중 갈등 속에 출범할 새 정부
국익 앞세운 국제 질서에 맞춰
구호 버리고 미세 조율 나서야

“반미(反美) 좀 하면 어떠냐”는 말은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전 한 강연에서 했던 발언이다. 이 말은 그 속내가 어쨌든 노 대통령의 안보 정체성처럼 따라다녔다. 결과적으로 실용외교 노선에 가까웠다거나 알고 보니 친미주의자였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반미’ 발언은 그만큼 대내외적으로 파장이 컸다.

노무현정부에선 외교안보 정책을 둘러싼 갈등도 지속적으로 노출됐다. 취임 첫해 한·미 관계 재정립과 자주적 대미 외교 목소리가 커지면서 외교안보라인에선 소위 동맹파와 자주파의 갈등이 이어졌다. 동맹파는 주류 엘리트인 외교부 북미국, 자주파는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 외교부 조약국이 중심이었다. 이라크 추가 파병, 주한미군 용산기지 이전 협의 과정에서 대통령이 자주파에 휘둘린다는 얘기가 동맹파 사이에서 나왔다. 이 발언이 투서로 이어졌고 청와대는 대통령 폄훼 발언으로 규정했다. 이는 위성락 북미국장, 조현동 북미3과장의 인사 조치로 이어졌다. 윤영관 장관도 옷을 벗었다.

갈등은 대외적으로도 이어졌다. 2005년 노 대통령이 ‘동북아 균형자론’을 내놓자 미국 조야는 “동맹에서 이탈하려 하느냐”고 반응했다. 그해 경주에선 한·미 정상이 대북 금융제재 문제를 놓고 1시간 이상 격론을 벌였다. 미 정부 관계자는 “최악의 회담이었다”고 회고했다. 낙관론을 바탕으로 남북 관계 개선에 올인했던 한국 대통령과 북한의 핵 포기에 회의적이었던 미 대통령 간 인식 차이를 그대로 노출한 사건이었다.

2017년 취임 직후 문재인 대통령은 주요국 특사단에 “한국이 피플 파워를 통해 출범한 정부이며, 정치적 정당성과 투명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라”고 주문했다. 외교안보 정책에도 정당성과 투명성을 고려하겠다는 취지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남북 정상회담, 북핵 해결에 과몰입한 탓인지 문재인정부는 북한 문제에서 환상에 빠졌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약속’을 과도하게 해석해 미국 설득에 진력했다. 미 행정부는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트럼프의 톱다운 의지에 따라 북·미 정상회담이 두 차례 열렸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은 파국을 맞았다. 그 직후 한·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는 문 대통령의 북한 관련 제안을 사실상 모두 거부했다. 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 역시 철저한 국익 중심의 외교 현실을 도외시한 전략이었다. 특히 취임 후 두 달 만에 종전선언, 평화협정, 항구적 평화체제를 거론한 것은 지나치게 성급했다.

21대 대통령 선거 유력 주자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얼마 전 유세에서 “중국에도 ‘셰셰’(謝謝·고맙다)하고 대만에도 ‘셰셰’하고 다른 나라하고 잘 지내면 되지, 중국과 대만이 싸우든지 말든지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제가 틀린 말을 했나”라고 했다. 주요국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자는 것이 발언의 핵심 취지라는 게 민주당 입장이지만 중국의 대만 침공 현실화를 우려하는 국제사회의 시각과는 확연한 차이가 나는 건 분명하다. 우리 해상 운송량의 30% 이상이 대만해협 및 인근 해역을 지나는 상황에서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한국이 막대한 피해를 보는 것은 자명하다. 양안 문제를 두고 양쪽에 “셰셰”하겠다는 것은 실용이 아니라 무책임에 가깝다.

과거 한·미·일 3국 정상회의와 군사훈련을 “역사의 바퀴를 해방 이전으로 돌리는 패착” “극단적 친일 행위”라고 했던 이 후보가 26일 굳건한 한·미동맹과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 원칙을 담은 외교안보 공약을 발표했다. 일본은 중요한 협력 파트너로 한·미·일 협력을 견고히 하겠다고 했고, 주요 무역상대국이자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중국과의 관계도 안정적으로 관리할 것이라고 했다. 또 대북 정책이 정치적 도구가 돼서는 안 된다고 했다.

수학의 정석 같은 원론적 공약이지만 문제는 이 고차원 방정식을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있다. 수십년간 이어진 ‘아시아·태평양’ 지역 개념이 중국 견제를 중시하는 ‘인도·태평양’으로 재편된 것처럼 국제 질서는 국익에 따라 순식간에 재편된다. 새 정부 출범이 임박한 지금 대한민국은 새로운 대외전략을 모색해야 할 기로에 서 있다. 관건은 구호가 아니라 그 정책을 구사하고 조율하는 디테일에 있다. 실용외교와 낙관론에 매몰된 외교는 그 미세한 차이에서 결정된다.

남혁상 편집국 부국장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