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말이 안 됩니다. 어떤 분야든 전성기라는 게 있는데, 피지컬이 중요한 이 게임에서 아직까지도 왕이라니요.’
최근 열린 ‘철권8’ 세계 대회 하이라이트 영상엔 이러한 댓글이 달렸다. 19일 게임단 DRX 사옥에서 만난 프로게이머 무릎(본명 배재민)에게 이 댓글을 읽어주자 그는 “앞으로도 계속 도전해야죠”라며 쑥스럽게 웃었다. 철권은 일본 유명 기업 반다이남코에서 개발한 대전 격투 게임이다.
이 베댓(베스트 댓글)은 배재민이 얼마 전 9300여 명이 참가한 국제 대회 ‘EVO 재팬’에서 내로라하는 강자들을 꺾고 왕좌에 오른 뒤 달린 것이다. 85년 6월생, 이제 마흔을 목전에 둔 그의 개인 통산 우승 횟수는 122회에 이른다.
“젊을 때보다 확실히 게임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적고, 손목 통증도 쉽게 와요. 오래 못 한다는 게 아쉽죠.”
과거 철권7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던 배재민은 지난해 출시한 철권8 초기 적응에 고전하며 슬럼프를 겪었다. 게임 시스템의 급격한 변화, 그로 인한 혼란과 스트레스 속에서도 그는 묵묵히 연습을 이어갔다.
“초창기 철권부터 해왔지만 8은 정말 납득하기 어려운 게임이었어요. 초반엔 맞다가 죽는 게 다반사였죠. 저도 불만이 많았지만, 프로로서 도태되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적응하는 데 집중했어요.”
배재민의 선택은 정면 돌파였다. 손에 익은 시그니처 캐릭터 브라이언 퓨리로 숙련도를 높였고 마침내 결실을 보았다.
“다들 브라이언이 강하다고 했지만, 대회 성적으로 증명한 사람은 없었죠. 저는 이 캐릭터가 그냥 저한테 맞았어요. 여러 캐릭터를 다루기보다는 하나에 집중하는 게 요즘 철권에 맞는 방식이기도 하고요.”
철권8은 유저들 사이에서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배재민은 그 속에서 길을 찾았다. 그리고 다시 팬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왕좌에 앉았다. 승부욕, 그것이 그를 지탱해 온 원동력이다.
“프로게이머들은 대부분 승부욕이 강한데 저는 특히 더한 것 같아요. 지면 엄청나게 열 받아요. 게임이니까 스트레스도 있지만, 이기면 정말 재밌는 게임이죠. 그게 지금까지 계속할 수 있는 이유예요.”
20년 가까운 선수 생활 동안 그에게도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과거에는 피지컬 기반의 반응과 조작이 주 무기였다면, 이제는 심리전이 더 큰 무기가 됐다.
“상대의 심리를 빠르게 캐치하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이른바 ‘다운로드 능력’(상대의 패턴을 파악하는 기술)이죠. 지금이 그 부분에서 20대 때보다 더 나은 것 같아요.”
배재민의 도전은 진행형이다. 숱한 우승 경력 와중에 아직 정복하지 못한 대회들이 그의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이번에 출전권을 얻은 사우디 e스포츠 월드컵(EWC)과 오랜 시간 번번이 고배를 마신 철권 월드 투어(TWT) 파이널이 그 대상이다. 그는 포기할 생각이 없다.
“은퇴는 아직 생각 안 해요. 정말 우승하고 싶은 대회들이 있어요. 일단 EWC 티켓을 일찍 확보했으니 여유 있게 준비할 수 있어요. 오프라인 중심으로 연습을 많이 하려고요.”
2021년 DRX에 합류한 이후, 배재민은 게임 외적으로도 성장했다. 체계적인 환경, 사옥에서의 연습, 그리고 후배 선수들과의 교류까지. 이제는 팀 내 맏형의 역할도 크다.
“이전 팀(락스 게이밍)에선 해외만 보내줘도 만족했어요. 지금은 DRX에서 훨씬 체계적으로 게임에 집중할 수 있어요. 후배들 연습을 도와주기도 하고, 사옥에서 대회도 열 수 있고, 환경이 참 좋아졌죠.”
그는 해외 팬들과도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유튜브 영상에 자막을 넣은 뒤 글로벌 팬들의 구독이 부쩍 많아졌다고. 특히 일본 팬들의 관심이 적잖게 늘었다.
“해외 팬들이 자막 넣어줘서 고맙다는 댓글을 많이 달아줘요. 많은 분이 봐주시고 응원해 주시죠.”
배재민의 관심은 이제 국가대표 무대에도 향하고 있다. 내년 아시안게임 e스포츠 종목으로 철권이 선정되면서 그의 눈빛도 달라졌다.
“90년대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며 웃고 떠들었던 제가, 올림픽에서 메달을 생각하다니. 시대가 정말 빠르게 변하고 있어요. 꼭 메달에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철권의 매력을 묻자, 배재민은 깊은 애정을 담아 말했다.
“철권은 역전의 맛이 있어요. 체력이 한 칸만 남아도 이길 수 있는 게임이죠. K.O 슬로우 모션 연출과 대역전극은 보는 사람도 도파민이 폭발해요. 게임을 잘 몰라도 때려서 이겼구나 하는 직관성이 있죠. 요즘 게임 중 보기 드문 매력이에요.”
끝으로 그는 팬들에게 진심을 전했다.
“나이를 먹어도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요. 믿어주신 팬들 덕분에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 보여드릴게요.”
이다니엘 기자 d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