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안은 나까지 4대째 기독교 집안이다. 아버지는 내게 조선 말기, 증조부로부터 이어져 온 신앙의 맥을 자랑스럽게 말씀하곤 하셨다. 우리 집안은 평안북도 용천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용천군 동화면에서 친조부는 고령교회를, 외조부는 덕흥교회를 섬겼다. 그러나 공산당이 정권을 잡자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졌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1947년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대전으로 월남하셨다.
아버지 형제들은 대부분 내려오지 못했고, 어머니의 형제 중에는 절반 정도만 월남했다. 외삼촌 최광준 목사는 피난을 거부하고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당원에게 총살을 당했다. 그는 한경직 목사와도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1954년 전쟁 직후 4녀 2남 중 막내로 대전에서 태어난 나는 어린 시절을 가난하게 보내야 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이었지만 내게는 음악이라는 안식처가 있었다. 교회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부터 노래 실력으로 두각을 나타낸 어린이였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때까지 체육 선생님의 권유로 기계체조 선수 생활을 했지만, 그 시절 내 꿈은 변함없이 음악가가 되는 것이었다. 그 어린 시절에도 유명한 작곡가가 되고 싶었던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구하면 주신다.’ 어린 나이에도 이 말씀을 붙잡고 단순한 기도를 반복했다. 음악가 집안도 아니었으며 음악을 공부할 만큼 부유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믿음의 기도를 응답해주실 것을 믿고 있었다.
1967년 대전중에 입학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던 나는 음악 시간 맨 앞줄 가장 좋은 자리를 꿰차곤 했다. 당시 음악 선생님이었던 박인섭 선생님은 예수를 믿는 분이었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매우 기뻐하셨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내가 음악에 대한 열의가 있다는 것을 아신 선생님은 개인 지도를 아끼지 않으셨다. 가정형편으로 정식 교습은 받아보지 못했지만 박 선생님의 도움으로 다른 친구들보다 음악에 대해 여러 가지 지식과 경험을 많이 얻을 수 있었다.
선생님의 지도하에 나는 노랫말에 가락을 붙이고 교정받는 일을 반복했다. 그때 작곡한 멜로디 10여곡의 악보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중학교 3학년 가을, 선생님이 나를 따로 부르시곤 “성모야 음악콩쿠르 나가보는 게 어떠니”라고 권하셨다. 당시 한국음악협회 충남지부 주최로 매년 음악콩쿠르가 열렸는데 내게 작곡부(창작부)로 나가보기를 제안하신 것이다. 개인지도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였지만 순종하는 마음으로 콩쿠르에 임했다.
시인 김소월의 시 ‘님의 노래’에 곡을 붙이는 것이 과제였다. 시는 “그리운 우리 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제 가슴에 젖어 있어요”로 시작했다. 결과는 ‘특등’. 당시 특등은 지금의 대상이었다. 성악부가 기악부 아닌 작곡부로 출전해 대상을 받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그때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이 특별한 수상이 내 진로를 결정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됐다. 오롯이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였다.
정리=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