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억울한 일을 겪는다. 성실히 준비했고 거짓 없이 일했으며 정직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결과는 실패와 손해, 심지어 조롱까지 감당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 터져 나오는 말이 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나요.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요.”
심리학자들은 억울함을 ‘정의가 무너졌다고 느낄 때 생기는 분노’로 설명한다. 이 도덕적 분노는 ‘내가 옳다’는 확신에서 나온다. 이런 확신이 크면 클수록 억울한 일이 많고 억울함이 많을수록 회개하기 어렵다.
유다의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만 의지해 유다 역사상 가장 과감한 종교개혁을 단행했다.(왕하 18:3~8) 기득권층의 반발을 무릅쓰고 산당을 제거했고 앗수르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런데 뒤이어 생긴 결과가 무엇이었는가. 앗수르 군대에 의해 포위되어 꼼짝없이 갇혔다.(왕하 18:17) 앗수르의 장관 랍사게는 히스기야를 조롱했다. “네가 의지한다는 그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이런 사건 앞에서 히스기야는 “내가 이런 일 당할 사람이 아닌데” 하며 억울해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히스기야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입고 있던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성전에 올라갔다.(왕하 19:1)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에게 전했다. “오늘은 환난과 징벌과 모욕의 날입니다.” 억울한 사건에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대신 하나님이 전적으로 옳으심을 인정했다.
5대째 모태신앙인 한 청년은 어려서부터 교회 생활을 했지만 늘 다른 사람의 잘못만 보았다. 특히 가족에게는 바리새인처럼 옳고 그름을 더욱 심하게 따졌다. 어느 날 그의 가정에 폭풍이 몰아쳤다. 아버지의 외도가 드러난 것이다. 어머니는 밤낮없이 소리를 지르며 분노를 쏟아냈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반응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잘못을 저지른 아버지만 원망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그는 점차 어머니도 정죄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큐티(QT)하는 중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변하지 않는 나의 바리새인 같은 모습을 깨뜨리기 위해 부모님이 수고하시는 것이구나.’ 그때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께 말씀드릴 수 있었다. “저의 구원을 위해 수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예전 같으면 정죄했을 모습에도 이해와 위로의 말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부모님의 싸움도 잦아들었다. 이렇게 가정에 평안함이 찾아왔다고 여겼다.
그런데 한 달 전 또 다른 사건이 왔다. 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해 머리를 다쳤고 의식이 온전치 않다는 연락을 받았다. 청년은 병원으로 달려가며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동생은 하나님을 떠나 있어서 지금 죽으면 지옥 갑니다. 제가 대신 죽어도 좋으니 제발 동생은 살려주시고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게 해주세요.”
동생은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퇴원했다. 그런데 살아난 동생은 그동안 자신을 간병해준 가족들에게 고맙다는 말은커녕 불평만 했다. 이에 어머니의 분노가 다시 폭발했고 그 화를 청년도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그러자 청년도 예전처럼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화를 내십니까. 도대체 언제까지 당해야 하나요”라며 억울함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는 히스기야가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성전에 올라간 본문의 설교를 들었다. 억울한 사건에서 히스기야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지 않고 오직 자신이 입을 새 옷을 찾아 방황하며 남 탓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부모님의 관계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고 동생은 마음을 닫고 있습니다. 저 역시 여전히 옳고 그름을 따지며 가족을 무시합니다. 이런 저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왔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사람이 아닌 제 모습만 보며 이렇게 고백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나보다 옳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옳으신 하나님을 따라가는 성도들이다. 구원이 목적인 인생이다. 그래서 어떤 억울한 사건에서도 주님만이 옳으심을 인정하며 자신을 힘들게 한 사람에게까지 이렇게 고백한다. “당신이 나보다 옳습니다.” 이런 겸손한 회개의 고백이 우리 사회에서 많이 들리길 소망한다.
(우리들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