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이공계 대학원생의 생계와 연구 성과는 국가 연구·개발(R&D) 예산과 교수진의 과제 수주 능력에 달려 있다. 2023년 R&D 예산 삭감으로 연구과제가 없어지자 일부 연구 인력은 학교를 떠나야 했고, 남은 인력도 임금이 줄어 힘겨워했다. 김찬호 대학원생노조 정책위원장은 25일 “지도교수가 인건비를 지급할 수 없으니 먼저 유학을 권유했다는 사례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오락가락하는 예산과 연구과제 급변경이 국내 연구 환경을 악화시킨다는 지적이 커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우자 상황이 개선될 것이란 기대가 부풀었지만 잠깐이었다. 학계는 최근 여건이 오히려 과거보다 더 나빠졌다고 입을 모은다.
대표적 사례가 윤석열정부의 R&D 예산 삭감 사태였다. 지난해 R&D 예산은 복구됐지만 최근 정부가 연구자 주도 기초연구비 지원 구조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연구과제 1000여개가 사라졌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2023년에는 정부가 중견연구 1381개, 기본연구 1570개 등 2951개 과제를 새로 선정했지만 올해 신규 과제 수는 1833개로 줄었다. 기존에 중견연구로 분류된 연구과제 수는 948개로 줄었고, 기본연구는 창의연구로 이름을 바꾸며 지난해 140개로 대폭 줄었다가 올해 885개로 부분 복구됐다.
정부는 해당 조치가 나눠주기식 과제 배분을 지양하고 과제별 평균 연구비를 늘려 연구를 내실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각 사업에 따라 연구를 진행한 연구자에게는 타격이 크다. 오경수 중앙대 약학대학 교수는 “3년간 줄어든 6000개 이상 과제 뒤에는 교수와 많게는 서너 명의 석박사, 박사후연구원(포닥)이 있다”며 “최소 1만명 넘는 연구자들이 연구 기회를 잃을 위기에 처한 셈”이라고 말했다. 오 교수는 “이런 위기 때마다 해외로 떠날까 고민하는 연구자의 수는 늘어난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문제의 근본적 배경은 국내 대학에서는 교수가 연구비 대부분을 경쟁 과제를 수주해 마련하는 데 있다. 이렇게 따온 정부나 기업 과제로 연구 장비, 대학원생 기본생활비, 연구 지원인력 운영비 등 비용 전반을 해결해야 한다. 정부가 지원하는 R&D 금액 중 최소 20%를 일반대학연구진흥금(GUF)으로 지원해 대학원생들에게 일정 소득을 보장하고 교원들의 과제 수주 부담을 줄여주는 주요국과 같은 완충장치가 한국에는 없다. 미국 역시 중앙정부 차원의 GUF 지원은 없지만 주정부 차원에서 대학을 일반재정으로 지원한다.
국내 대학원생들은 교내외 장학금을 제외하면 교수가 나눠주는 인건비 등으로 생계를 충당한다. 그 결과 이공계 대학원생 상당수는 2013년 도입됐다 사라진 임금 하한선(석사 80만원, 박사 120만원)을 보장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연구과제별 금액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교수들은 개인 과제를 추가 수행하거나 집단연구 과제에서 용역을 수행하는 ‘편법’으로 부족분을 보충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연구과제가 예산 삭감이나 우선순위 조정으로 사라질 때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대학 내 연구자에게 돌아간다. 국내 32개 기초연구 관련 학회와 단체가 모인 기초연구연합회는 연구 생태계 복원을 위해 6000억원 이상을 즉각 투입해 과제들을 복원해 달라고 요구했다. 공공과학기술연구노동조합은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통해 연구자들이 차질 없이 계획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고 내년도 R&D 예산은 물가인상률을 반영한 수치로 전면 복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준식 기자 semipr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