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포퓰리즘 잠식된 베네수엘라 선거

입력 2025-05-26 00:38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마이크 폼페이오는 미국에 대적하는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경제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멸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베네수엘라에서 대규모 정전 사태가 발생한 2019년 3월 폼페이오는 소셜미디어에 이렇게 적었다. “마두로의 정책은 어둠을 불러올 뿐이다. 베네수엘라에는 식량과 의약품도, 이제는 전력도 없다. 다음에는 마두로가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6년이 흘러 트럼프 집권 2기가 출범한 올해에도 마두로 정권은 몰락하지 않았다. 마두로는 3선에 도전한 지난해 7월 대선에서 국제사회가 제기한 부정선거 의혹에도 꿋꿋하게 승리를 주장하며 임기를 2031년까지 연장했다. 마두로는 이번 임기를 완주하면 총 18년간 집권하게 된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전력 부족, 이에 따른 국민의 해외 이탈이 계속되는데 마두로 정권은 민생이 회복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은 지난 1일 보고서에서 “올해 1분기 국내총생산(GDP)이 9.32% 증가해 16분기 연속으로 성장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독립 기관인 베네수엘라 재정관측소는 올해 1분기 성장률이 -2.7%로 역행했다고 분석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달 발표한 2025년 세계 경제전망 보고서에서 베네수엘라의 연간 GDP 성장률을 -4%로 제시했다.

과거의 베네수엘라는 지금과 달랐다. 1970년대 베네수엘라의 1인당 GDP는 스페인과 비슷했고 남미에서는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부유했다. 수도 카라카스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초음속 콩코드 여객기가 직항으로 왕래할 정도였다. 베네수엘라에 막대한 부를 안겨준 것은 석유였다. 2023년 미국 에너지관리청의 원유 매장량 조사에서 3038억 배럴로 세계 1위에 오른 ‘석유 대국’이다. 1960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를 설득해 석유수출국기구(OPEC) 창립을 주도했던 국가도 베네수엘라였다.

이런 베네수엘라도 결국 ‘자원의 저주’를 피하지 못했다. 서구 에너지 기업들이 내미는 ‘오일 머니’의 단맛을 본 베네수엘라 지도자들은 제조업을 육성하는 대신 민족주의 기반의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하며 몰락을 자초했다.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대통령이 1976년 석유산업을 국유화하고, 1999년부터 집권한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무상복지 정책을 쏟아내며 베네수엘라의 산업 경쟁력은 갈수록 약화됐다.

몰락에 쐐기를 박은 것은 마두로였다. 2013년 사망한 차베스의 국정 기조를 계승해 집권한 마두로는 국제유가 하락으로 인한 재정 악화에 돈을 찍어 대응했다. 늘어난 현금에 통화 가치가 하락하고 물가가 오르자 베네수엘라 경제는 잠식됐다. 베네수엘라산 원유는 미국의 제재를 피해 몰래 내다 팔기에는 무겁고 점도가 높은 초중질유인 데다 황 함량이 높은 탓에 정제도 어려워 글로벌 에너지 대기업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채산성을 맞출 수가 없었다. 이제 베네수엘라 국민에게 남은 경제난 극복의 기회는 선거를 통한 정권 심판뿐이다. 하지만 포퓰리즘 정책의 단맛에 심취했던 유권자들이 정신을 차릴 땐 마두로 정권이 선거관리위원회와 사법부, 언론을 장악하고 정적들을 제거한 뒤였다. 한국시간으로 26일 오전 끝나는 베네수엘라 총선에서 결과 못지않게 주목할 것은 투표율이다. 정치 불신을 넘어 무력감에 빠진 유권자들이 투표 보이콧에 나섰다고 한다. 20% 안팎의 낮은 투표율 전망도 나오는데 마두로는 야권의 부정행위를 주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철오 국제부 차장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