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남아공 백인에 대한 탄압을 중단하라고 압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회담 중 백인 탄압 증거라며 영상을 틀기도 했다. 이날 회담은 지난 2월 트럼프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회담만큼 고성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내내 긴장이 흘렀다.
트럼프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라마포사 대통령을 만나 진위 논란이 있는 ‘백인 농부 집단살해’ 문제를 꺼내 들었다. 트럼프는 “일반적으로 (피해자는) 백인 농부들”이라며 “당신(라마포사)은 그들이 땅을 빼앗도록 허용하고, 그들은 땅을 빼앗을 때 백인 농부를 살해한다. 그들이 백인 농부를 살해해도 그들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트럼프는 이어 “조명을 꺼 달라”고 말한 뒤 기습적으로 백인 농부 학살 의혹 영상을 틀도록 했다. 남아공의 극좌 야당 정치인 줄리어스 말레마가 “보어인(네덜란드계 백인)을 죽여라”라는 가사가 포함된 노래를 부르는 장면 등이 포함된 영상이었다. 트럼프는 영상을 보면서 “여기가 바로 매장지”라며 “1000 명이 넘는 백인 농부들이 매장돼 있고 차량이 애도를 표하기 위해 줄지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라마포사는 “저기가 어디라는 말씀을 들었나? 나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고, 트럼프는 “남아공에 있다. 공무원인 사람들이 백인 농부를 죽이고 땅을 뺏으라고 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라마포사는 트럼프의 주장에 대해 “우리는 그런 행동에 전적으로 반대한다”며 “우리나라에는 범죄가 있지만 안타깝게도 범죄 행위로 사망하는 사람들은 백인만이 아니고 대다수가 흑인”이라고 반박했다.
트럼프는 백인 희생자 관련 기사를 출력한 문서를 라마포사에게 건네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 언론들은 남아공 백인 농부 학살 주장은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AP통신은 “남아공에선 모든 인종의 농부가 폭력적인 주택 침입의 피해자가 되고 있지만 백인이 인종 때문에 표적이 됐다는 증거는 없다”고 전했다.
이날 트럼프는 젤렌스키와의 회담 때처럼 모욕적인 발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상대국 정상에게 추궁하듯 발언을 이어가면서 회담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라마포사는 골프를 좋아하는 트럼프를 의식해 남아공의 전설적 골퍼 어니 엘스를 배석시켰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트럼프의 주장은 남아공 정부가 백인 농부에 대한 공격을 허용하고 있다는 미국 보수 진영의 의혹 제기를 되풀이한 것이다. BBC는 “이런 퍼포먼스 중심의 외교 스타일은 미국 내 대중을 겨냥한 것”이라고 짚었고, 가디언은 트럼프가 외교를 리얼리티 쇼로 만들고 있다고 꼬집었다. 악시오스는 “트럼프의 집무실은 세계 지도자들에게 위험 구역이 됐다”며 백악관을 방문하는 각국 정상은 트럼프에게 기습 공격을 당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워싱턴=임성수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