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대략 세 그룹의 묵은 야구팬이 있다. 기아 타이거즈 팬은 줄부상과 이해 못할 라인업으로 올해 시작부터 장사를 망치고 있지만 비교적 여유가 있다. 작년에 우승했고, 김도영이라는 슈퍼스타도 가졌다. ‘못한다, 못한다’ 해도 10년에 한 번씩은 우승을 하니 최소한의 평정심 유지가 가능하다.
롯데 자이언츠 팬이 있는데, 이들은 야구 이야기가 시작되면 통제가 좀 불가능한 편이다. 염종석의 팔을 대가로 바친 마지막 우승이 33년 전인 1992년인 탓이다. 제리 로이스터 감독의 ‘노 피어’ 야구 등 돌풍을 일으킨 적은 있지만 우승 갈증만큼은 해소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이 야구 이야기를 시작하면 “봄에라도 야구 잘하는 게 어디냐”며 응원하는데, 반응은 영 시원치 않다. 올해는 커튼 뒤에서 외국인 선수 기강을 호되게 잡았다는 의미의 ‘튼동’(커튼+감독) 김태형 감독의 진두지휘 아래 상위권을 질주 중이고 그만큼 환호도 커지고 있다.
그리고 위 두 팀과 달리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한화 이글스 팬이 있다. 가장 최근 우승이 롯데 못지않게 까마득한 1999년이다. 이들과 야구 이야기를 시작하면 대개 류현진으로 끝이 난다. 류현진이 잘하면 잘해서, 못하면 못해서로 끝난다. 매년 꼴찌를 하는데도 홈구장을 가득 메우고 육성 응원하는 팬들의 지고지순한 열정만 회자될 뿐이었다. 이번 스토브리그에서 만난 한 야구단 고위 관계자는 “이글스는 최근 몇 년간 수백억원을 야구에 쏟았다. 야구판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정말 잘해야 한다”며 ‘격려’하기도 했다.
실제 이글스가 요새 좀 달라졌다. 자이언츠와 엎치락뒤치락하며 1위 LG 트윈스 뒤를 바짝 쫓고 있다. 스토리도 탄탄하다. 우선 감독이 사실상 둘이다. 올림픽 금메달의 주인공 김경문 감독 아래 LG 트윈스에서 감독·단장을 역임했던 양상문 투수코치가 버티고 있다. 그래서인지 문동주, 김서현 등 젊은 선수들이 빠르게 자리를 잡고 있다. 160㎞를 넘나드는 구속을 가진 젊은 선발과 마무리는 야구팬의 가슴을 뜨겁게 하기에 충분하다.
여기에 마침내 한화에도 ‘푸른 눈의 에이스’가 등장했다. 선발투수 코디 폰세는 21일까지 8승 0패 1.48 방어율을 기록 중이다. 67이닝 동안 93개 삼진을 잡았고, 위기를 막을 때마다 포효하고 동료를 격려하는 쇼맨십까지 갖췄다. 그야말로 슈퍼스타 자질을 지닌 그는 지난 17일 끝내 ‘사고’를 쳤다. SSG 랜더스와의 경기에서 선발 등판해 8이닝 동안 2피안타 무실점, 무려 18개의 삼진을 잡아낸 것이다. 이는 이글스의 심장 류현진이 2010년 LG 트윈스전에서 기록한 정규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17개)을 뛰어넘은 신기록이었다.
그는 18번째 삼진을 잡은 후 마운드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2017년 돌아가신 어머니께선 제가 마이너리그에 있을 때 TV 방송에 못 나오니까 ‘빨리 유명해져라. 그래야 내가 널 TV로 볼 수 있지’라고 농담을 하셨다”고 입을 열었다. 이어 “오늘 이런 모습을 관중석에서 보셨으면 굉장히 뿌듯하셨을 거다. 그 순간을 하늘에서 보고 계실 어머니 생각이 났다”고 설명했다.
고교 때부터 치열했던 문·김대전(문동주-김도영 경쟁), 입스가 의심될 정도로 제구력 난조를 보였으나 화려하게 돌아온 불같은 강속구의 마무리 투수, 마운드 위에서 눈물을 흘린 낭만파 외국인 에이스, 그리고 이들을 조련한 두 명의 감독.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가 승패와 더불어 인간 본연의 감정에 따른 것이라면 그야말로 우승에 어울리는 스토리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번 시즌은 이글스가 우승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롯데 팬에게는 정말 미안한 얘기다.
강준구 콘텐츠랩장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