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우물론과 호텔 경제론

입력 2025-05-23 00:40

조선의 박제가는 1778년 ‘북학의’에서 “재물은 우물과 같아서 퍼 쓸수록 자꾸 찬다”며 “비단옷을 입지 않으니 나라 안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어진다”고 설파했다. 경제란 절약이 아닌 소비와 생산의 선순환으로 살아난다는 것이다. 그의 우물론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유효수요 이론보다도 150년 앞선 혜안이었다.

이재명 대선 후보는 최근 TV토론에서 우물론을 연상케 하는 ‘호텔 경제론’을 꺼내 들었다. 여행객이 호텔 예약금 10만원을 내면, 그 돈이 정육점, 미용실, 식당을 돌고 난 뒤 여행객이 예약을 취소해도 상권에 활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결국 마을에 들어온 돈은 없지만 거래가 발생했다. 이게 경제다”라고 설명했다.

언뜻 신박해 보이지만 이 경제론엔 뭔가 빠져 있다는 허전함이 풍긴다. 바로 마중물의 부재때문이다. 박제가는 실제 돈을 들여 소비하는 것이 생산 고용을 유발해 경제를 촉진한다고 봤다. 반면, 호텔 경제론은 돈이 회수되면서 실질 자산도 형성되지 않고 겉돌아 실물경제로 이어지지 못한다. 물이 안 나오는 우물에서 바가지만 열심히 퍼 올리는 형식적 선순환인 셈이다. 누리꾼들이 “카녜이 웨스트가 내한 공연 예약만 했다 취소해도 경제에 도움이 되느냐”며 ‘노쇼 주도 성장’으로 비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후보는 재정의 승수효과를 설명하기 위한 극단적 예시라고 항변하지만, 문제는 호텔이 아니라 국가에서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고 마구 혈세로 회수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끔찍하다.

한국은행은 더 난처해졌다. 지난해 말 발간한 ‘한국은행과 지급결제제도’ 책자에서 제시한 “호텔 예약금 5만원이 돌며 채무를 상환하는 사례”가 호텔 경제론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오해를 받고 있어서다. 이는 한은이 유력 후보 정책에 숟가락을 얹은 것으로 오해를 사기에 충분했다. 한은은 “해당 사례는 지급결제 시스템에서의 유동성 공급 예시일 뿐 재정정책과는 무관하다”며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부디 호텔 경제론으로 우물에서 숭늉 찾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동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