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아일랜드 더블린. 한 남자의 장례식이 엄숙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오랜 지병 끝에 세상을 떠난 고인의 관이 땅속으로 내려가던 그 순간, 장내에 갑자기 기이한 소리가 울렸다. “똑똑똑!”
관 속에서 두드리는 소리였다. 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어디지? 날 좀 꺼내줘! 여긴 너무 어둡잖아!”
순간 놀라움과 함께 장내에 웃음이 번졌다. 고인의 딸이 준비한, 아버지가 생전에 직접 녹음해 둔 장난스러운 음성이었다. “아버지는 늘 사람들을 웃게 하고 싶어 하셨어요. 장례식이 눈물바다가 되지 않길 바라셨지요.” 울음으로 가득할 뻔했던 장례식은 따뜻한 웃음과 추억으로 채워졌다.
죽음을 유쾌하게 맞이한 이 장면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죽음은 꼭 눈물로만 배웅해야 할까’ ‘장례식은 반드시 슬픔만 가득한 의식이어야 할까.’
서구 사회에서 죽음은 더 이상 숨기거나 피할 대상이 아니다. 함께 나누고 유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 유언장에 농담을 남기고 자신의 장례식에 재즈 연주를 부탁하기도 한다.
반면 우리 문화는 여전히 장례를 조심스럽고 엄숙하게만 대한다. 죽음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리고 숨을 거둔 뒤에야 분주하게 움직인다. 고별의 시간은 늘 남겨진 이들의 슬픔에만 머물러 있다.
2025년 5월 강릉 사천면 바닷가. 특별한 부고장과 마주하게 됐다. “장례식은 엄숙해야 한다고 누가 정했을까요. 오늘만큼은 다릅니다. 당신은 우는 대신 웃어야 합니다. 나의 친구여, 나와 오래 동반한 이여. 꽃은 필요 없습니다. 꽃 대신 기억을 들고 오세요. 마지막으로 들으면서 나의 목소리를, 내가 좋아했던 대사를, 오래된 이야기와 가벼운 농담을, 우리가 함께 웃었던 순간을 안고 오세요. 이것은 작별이 아니라 쉼이며 끝이 아니라 막간이니까요.”(연극배우 박정자)
무대에서 수많은 삶의 장면을 연기했던 그녀. 마지막 커튼콜을 마치고 고요한 퇴장을 알렸다. 여느 부고와는 달랐다. 엄숙함 대신 유머와 여운이 담겨 있었고 슬픔 대신 웃음을 요청했다. 지인 150명을 초대해 열리는 고별의 자리는 하늘 너머 무대의 리허설을 준비하는 83세 예술가의 유쾌한 작별 인사였다.
2012년 가을 나는 한 일간지에 ‘죽기 전 듣고 싶은 한 마디’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장례식을 주인공 없는 의식으로 남겨두지 말고 살아 있는 동안 사랑하는 이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자는 것이었다. ‘사전 장례식(living funeral)’ 제안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다소 엉뚱해 보였을 수 있는 상상이었지만 그 글의 마지막 문장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 선명하다. “어떤 사람들은 75세에 장례식을 치렀지만 여전히 살아 있다.”
그로부터 13년이 흐른 지금 그 상상이 무대 위에서 문화 예술의 현실로 구현된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자기 죽음을 스스로 연출해 낸 용기에 무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삶의 마지막을 의식 있는 사람으로 마감하는 방식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글 이후, ‘엔딩 파티’란 이름으로 생전식(生前式)을 이끌어 보았다. 장례 문화를 바꾸고픈 몸부림이었다. 그때마다 돌아온 답은 ‘굳이 왜’ ‘멀쩡하게 살아계신 분에게 죽음을 부추기는 거 아닌가’ ‘칠순 잔치, 팔순 잔치 한 번 더 하면 되지’ 등이었다. 그만큼 낯선 문화였던 셈이다.
앞서 셰이 브래들리(Shay Bradley)의 유쾌한 마지막 인사와 박정자의 품위 있는 생전 고별무대는 한 가지 사실을 일깨운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곧 삶을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것. 울음만이 아닌 기억과 감사, 웃음과 용서로 작별을 나누자는 유쾌한 반란이다.
한국의 장례는 여전히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갑작스레 닥친 죽음 앞에서 황망한 유족들이 분주히 의식을 치른다. 뒤늦게 후회와 회한 속에 고개를 떨군다. 죽은 이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채 영정 속 사진 한 장으로 대체된다. 만약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이별을 준비할 수 있다면 어떨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고 용서를 구하고 감사와 축복을 직접 전할 수 있다면. 농담 한마디, 웃음 한 자락을 남기고 내 인생의 마지막을 스스로 기획하고 떠날 수 있다면 그건 장례가 끝이 아닌 삶의 가장 품위 있는 완성이 아닐까. 거기에 새로운 시작이 있는 거고. 엔딩(Ending)이 아니라 앤딩(Anding)을! 여전히 변함없는, 나의 작은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