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아, 네가 도대체 무엇이냐

입력 2025-05-23 00:10
등단 60년을 앞둔 오정희 작가가 오랜만에 신작 소설집을 발표했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긴 세월 ‘글쓰기’는 내게 남모를 기쁨이고 순정한 꿈이었다”면서 “깊이 응시하고 오래 곰삭히며 매일 매일, 천천히, 조금씩 쓰는 삶을 살고 싶었다”고 썼다. 삼인 제공

오정희가 작가로서 세상에 나온 것은 1968년 ‘완구점 여인’을 통해서였다. 그동안 이상문학상(1979·저녁의 게임), 동인문학상(1982·동경), 오영수문학상(1996·구부러진 길 저쪽), 동서문학상(1996·불꽃놀이) 등을 수상하며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오정희는 등단 60년을 앞둔 작가로서의 시간과 발표한 작품 수가 비례하지 않는 ‘과작(寡作)’의 작가로 유명하다. 세 편의 중단편이 수록된 이번 소설집을 통해 작가는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오랜만의 신작 소설집이라 더욱 의미가 크다.


표제작이면서 첫 수록 작품인 ‘봄날의 이야기’. 주인공이자 일인칭 화자는 떠돌이 암캐 황구다. 우화 같은 독특한 형식의 소설을 통해 작가는 다양한 인생의 모습을 관조한다. 이름도 없는 개는 길거리를 헤매다 “밤이슬 맞으면서 한뎃잠 자지 말고 여기서 자라”고 헛간을 내어 준 ‘그 여자’네 집에서 보금자리를 얻었다. “복날 조심하라”며 군침을 흘리는 남자에게 “짐승이든 어떤 미물이든 내 집에 찾아드는 것은 그리운 게 있어서”라고 핀잔을 주는 따뜻한 ‘공감’의 여자다. 여자의 죽음으로 상실의 ‘슬픔’을 겪은 황구는 다시 떠돌이가 돼 세상 사람들의 ‘경멸’을 마주한다. 주인이 오로지 새끼를 낳게 해 팔 요량으로만 키우는 늙은 개 ‘해피’도 한동네에 사는 친구다. 벚꽃이 떨어지는 봄날, 곧 팔려갈 새끼들이 어미의 꼬리를 물고 노는 모습에 주인공 황구는 까딱 모를 ‘슬픔’에 빠지기도 한다. 황구는 “햇빛과 바람과 분분히 날리는 흰 꽃잎의 평화가, 그 안에서 노니는 그들이 다만 무심하고 무심할 뿐인데 나는 자꾸 울음이 치미는 듯 목이 메었다”고 읊조린다. 소설은 언제나 곁을 배회하던 ‘붉은 개’와의 마지막 교미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욕정을 발산하는 ‘기쁨’의 순간이지만 무언가로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배어 있다. “뱃속에서부터 치미는 이상한 기쁨과 슬픔과 구역질을 참으며 나는 아무런 맛도 냄새도 느껴지지 않는 마른 뼈를 우적우적 씹는다.” 삶이란 어느 하나로 단정 지을 수 없고 모순덩어리라는 점을 말해주는 듯하다.

비교적 짧은 두 번째 작품 ‘보배’는 하와이 이민 1세대 여성으로 요양원에서 팔십 평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박보배’의 이야기다. 작은 이야기 속에서도 근대사를 관통하며 민족의 아픔과 강인함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노 작가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작품은 인생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외로운 이국땅에서 다섯 명의 아이를 어엿하게 성장시켜 일가를 이룬 박보배는 말한다. “이만하면 한세상을 ‘살았다’ 하지 않겠나 싶다. 그것으로 족하지 않나 싶다.”

마지막 작품 ‘나무 심는 날’은 어머니를 여읜 뒤 부모가 월남할 때 북에 두고 온 막내 삼촌 이야기를 쓰는 소설가의 이야기가 중심축을 이룬다. 자서전과 회고록의 대필과 윤문으로 밥벌이를 하는 소설가는 “온갖 역경과 불행과 인생에서 일어날 법한, 또한 도저히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들의 종합 세트장”인 의뢰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에게서 느끼는 인생이란 그저 “진부함과 상투성”일 뿐이다. 하지만 모든 이들은 저마다의 인생을 살고 있기에 재단은 금물이다. 소설 속 화자는 원로 작가의 유언과 같은 마지막 글귀 ‘인생아 네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을 곱씹는다. 그리곤 ‘우리의 삶은 우주가 꾸는 크나큰 꿈속의 아주 작은 꿈일 뿐’이라는 장자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보배’ 속 화자의 말처럼 인생이란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고 써 내려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는 옳고 그름이 없는, 평가의 대상이 아닐 것이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