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를 밝히 아는 일은 귀하다. 여러분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은 자신을 실제보다 과장한다. 반대로 열등감에 젖어 있는지도 모른다. 주님은 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쯤 되는 무리의 끼니를 해결하셨다. 이 일을 계기로 그곳에 모였던 무리가 주동해 주님을 세상의 임금으로 추대하려 나셨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것을 아시고 혼자 산으로 떠나셨다.(요 6:15) 당신의 처지를 누구보다 밝히 아시는 주님은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당신의 사명 수행을 위한 방법이 그 길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지를 바로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정체성은 스스로 부여할 수 없다. 때때로 우리는 타인 안에서 타인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지만 이는 정확하지 않다. 또 스스로 자신을 판단하는 내 정체성은 객관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자주 변덕을 부리게 돼, 결국엔 양심 자체도 내 편이 되기 마련이다. 내 정체성을 찾는 방법은 내 정체를, 내가 누군지를 가장 정확히 아시는 분은 나를 만드시고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판단뿐이라는 걸 믿는 것이다.(고전 4:1~4)
모세의 경우를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오셔서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하셨다. 그러자 모세는 “내가 누구이기에 이 일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출 3:10~11) 이때 모세는 자신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못할 때가 아니었을까. 시간이 흐르며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됐다. 그는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절하고 잠깐 죄의 즐거움을 누리기보다는 하나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했다. 이집트의 온갖 보물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으며, 오직 하나님이 주실 상만을 바라봤다. 다행히 정체성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히 11:23~26)
다윗의 경우를 살펴보자. 엘라 골짜기 양쪽 언덕에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 챔피언 골리앗이 앞장선 백성과 병사들과 함께 대진하고 있었다. 키가 2m나 되는 골리앗이 앞장서 사울 왕과 이스라엘 백성을 조롱하는 가운데 막내 다윗이 형들에게 문안을 전하며 식사하러 왔다. 전황을 보고 격분한 다윗은 전투 참전을 원했고, 왕은 투구와 칼과 전투복을 그에게 입혀 시험적으로 걸어보게 했다. 하지만 다윗은 “이 옷을 입고 갈 수 없습니다”라며 “거추장스러워서 몸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왕의 제안을 사양하고 대신 손에 막대기와 시냇가에서 조약돌 다섯 개를 골라 양을 칠 때 쓰는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든 채 골리앗 앞으로 다가갔다. 다윗은 물매와 돌로 골리앗을 죽였으나 그의 손에는 칼이 없었다.(삼상 17:50)
칼 없이 이긴 전쟁이다. 다윗이 골리앗과 대결하기 전, 이미 양을 돌보는 목자로서 인간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배웠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 나는 그의 양이라는 정체성이다. 이는 최선의 관계이며 복된 삶이다. 이 관계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일상생활 속에서 경험할 때 우리는 주님께 더 가까워진다.
‘목자와 양’(시 23:1~6) 그 이상의 무엇이 더 필요할까. 그런데 우리는 때론 이 “부족함이 없다”는 내용을 기복 사상이나 만사형통의 뜻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이 관계는 나의 정체성이다. 하나님이 안 계시면 나도 없다.
(웨이크신학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