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르네 지라르 추종자

입력 2025-05-22 00:32

‘잘 알려지지 않은 프랑스 문학평론가가 어떻게 미국 우파의 선구자가 됐나’라는 제목의 기사가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에 실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집권을 도운 피터 틸(57)과 그가 정치적 거물로 키워낸 J D 밴스(40) 부통령이 모두 르네 지라르(1923~2015)의 열성팬이라는 내용이다. 틸은 핀테크 기업 페이팔, 방산 인공지능(AI) 선두업체 팔란티어 등을 창업한 실리콘밸리의 거물이다.

지금 미국 권력의 핵심은 당연히 트럼프고, 그의 머릿속을 알아야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진득하게 공부하는 것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트럼프에게는 사업가로서 감각·전략 외에 어떤 사상적·철학적 기반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현시점에서 ‘포스트 트럼프’ 주자로 가장 유력한 2인자 밴스와 그의 뒷배 틸은 트럼프 밑에서 미국을 움직이는 파워맨이기 때문에 그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테다. 가방끈이 긴 틸과 밴스는 자신의 사상적 궤적을 말이나 글로 밝히기도 했다.

스탠퍼드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틸은 학부생 시절 그 대학교수 지라르가 만든 독서그룹에 참여하면서 그의 추종자가 됐다. 밴스는 예일대 로스쿨을 다닐 때 “경쟁을 피하고, 사람들이 경쟁을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가치를 창출하라”는 틸의 강연을 듣고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다. 경쟁을 피하라는 것은 지라르의 논리였고 밴스도 곧 지라르의 사상에 심취했다.

지라르 이론의 핵심은 ‘모방 욕망’과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근본적으로 모방적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이 모방 욕망은 모두가 같은 자원을 두고 경쟁함에 따라 갈등과 폭력으로 귀결된다. 공동체 전체로 퍼진 갈등과 폭력을 잠재우기 위해선 폭력의 책임을 단 하나의 대상, 즉 희생양에게 집중시킨 뒤 제거해야 한다. 희생양에 대한 폭력을 통해 질서는 회복되지만 이는 일시적인 것이어서 언제든 다시 무너질 수 있다.

이런 악순환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책은 매우 종교적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박해자와 희생양에 관한 진실을 숨기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폭력의 실체가 곧 사탄이다. 그리고 자신이 무고한 희생양이 됨으로써 희생양 메커니즘의 부당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인 존재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다. ‘좋은 모방의 모델’인 그리스도를 사람들 모두가 모방하려 노력한다면 폭력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

이런 세계관이 우파 셀럽들을 사로잡은 이유는 인류의 근본적 문제가 착취나 빈곤이 아닌, 인간 욕망의 기이함(모방 본성)에 기인한다고 설명하면서 기독교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또 희생양 메커니즘은 ‘캔슬 컬처’(취소 문화)에 대한 우파의 비판 논리를 제공한다. 어떤 유명인이 정치적 올바름(PC)에 어긋난 언행을 했다고 까발려서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것이 곧 희생양에 대한 폭력이라는 것이다.

트럼프가 핵심 정책 중 하나로 밀어붙이는 불법 이민자 추방도 전형적인 희생양 메커니즘 사례다. 트럼프는 지난 대선 전부터 불법 이민자들에게 ‘살인자, 흉악범, 미국의 피를 오염시키는 나쁜 유전자’라는 낙인을 찍고 온갖 국내 문제들의 책임을 뒤집어씌웠다. 이들 희생양을 벌주고 내쫓으면 일시적인 효과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폭력일 뿐이며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지라르가 말한 해결책인 ‘그리스도 모방 노력’으로 가는 건 감당할 사람이 몇 없어 보인다. 너무 거룩해서 속된 인간들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천지우 국제부장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