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 자율성 보장” “정부가 교육 통제”… 100년간 되풀이된 공방

입력 2025-05-22 03:27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배재학당 동관 모습이다. 복원된 건물로 현재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국민일보DB

선교사들과 국내 선각자들이 세운 기독교 사립 교육기관이 조선의 근대화와 항일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제 조선총독부는 식민 통치에 걸림돌이 되는 사립학교를 말살하기 위해 여러 방식으로 압박하고 회유했다. 1908년 사립학교령, 1911년 사립학교규칙 제정 등을 통해 사립학교를 총독부의 통제 아래 뒀다. 특히 1915년 사립학교규칙 개정은 채플과 기독교 과목을 금지함으로써 신앙 교육을 금지했다.

이 사립학교규칙 개정과 관련해 미국북장로교 선교부 총무 아서 J 브라운은 총독부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고 고마쓰 국장도 이에 대해 답신했다.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서신이 오갔다. 양측의 입장은 극명하게 달랐고 결국 총독부의 교육 정책을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이 논쟁은 정교분리 원칙을 사립학교 문제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사례로 남아 있다.

두 사람 모두 정교분리 원칙에는 동의했지만 해석은 판이했다. 브라운 총무는 사립학교가 국가의 관리를 받는 기관이면서도 종교적 가치를 건학이념으로 삼고 있으므로 교과과정 편성에 있어 자율성이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고마쓰 국장은 교육이 국가의 공적 임무의 일부이므로 정부가 모든 교육을 관장해야 한다고 봤다. 그는 기존 사립학교의 기득권은 인정하되 점차 이를 정리해 공교육 체제로 흡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라운 총무는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의 자율적 공존을 지지했으며 고마쓰 국장은 교육을 국가가 독점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 공공성을 내세웠다.

놀랍게도 오늘날 대한민국의 사립학교 정책은 고마쓰의 해석을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 한국의 공교육 체제는 빠르게 정비됐지만, 그 중심에는 일제의 국가주의적 교육 모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제가 조선 민중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여러 장치는 이름만 바뀌어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애국 조회, 국기 배례, 학도호국단 창설, 국민교육헌장 제정 등은 전체주의적 성격을 띤 국민교육의 도구들이었다. 공공성을 명분으로 한 통제는 사립학교에도 예외 없이 적용됐다.

1963년 제정된 사립학교법은 자율성과 공공성의 균형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정부가 사립학교의 공영화를 지속해서 추진해 왔다. 특히 1974년 고교평준화 정책 이후 사립학교는 학생 선발권을 박탈당했고 국가의 장학지도와 행정 간섭은 더욱 강화됐다. 기독교계 사학들은 이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채플과 종교 과목을 통해 신앙교육을 이어 왔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교육과정 개편과 인권 논쟁으로 인해 기독교 교육의 자율권은 점차 위축되기 시작했다. ‘대광고 강의석 사건’은 이러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현재 대부분의 기독교 사학에서는 채플 의무화나 종교 과목을 통한 기독교 교육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1900년대 초반 이화학당 앞에 학생과 교사가 모여 기념촬영을 하는 장면. 아래 사진은 비슷한 시기 경신학당 모습. 모두 100년 넘은 대표적인 기독 사학이다. 국민일보DB

이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이다. 과연 기독교 사학은 공공성을 훼손하고 있는가, 아니면 오히려 공교육의 다양성과 도덕적 기반을 보완할 수 있는 파트너가 될 수는 없나. ‘공공성 대 자율성’이라는 이분법은 오래된 정치적 프레임일 뿐이다. 진정한 공공성은 무조건적인 통제를 의미하지 않으며 자율성도 종파성을 뜻하지 않는다. 위르겐 하버마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 명예교수의 주장처럼 자율적인 주체들이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공동선을 만들어 갈 때 진정한 공공성이 실현될 수 있다. 공공성과 자율성은 대립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며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다.

기독교 사립학교는 기독교를 전파하고 개종을 요구하는 교회가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체 정신, 진리 추구, 섬김의 리더십과 같은 기독교적 가치들은 오히려 민주 시민 교육의 기반이 된다. 독일이나 미국처럼 종교적 정체성을 가진 사립학교가 국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교육 철학과 종교 교육을 통해 공공성에 기여하도록 제도적 여지를 보장해야 한다.

물론 기독교 교육이 강제돼서는 안 되며 종교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를 침해하는 방식으로 운영돼서도 안 된다. 그러나 학생과 학부모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정체성 기반의 교육이라면 국가는 이를 존중해야 한다. 동시에 기독교 사학도 공공성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져야 한다. 재정의 투명성이나 교사의 자격 기준, 학생 인권 보장 등에서 공공성과 자율이 함께 실현되는 성숙한 운영이 요구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여전히 100년 전 ‘브라운과 고마쓰 논쟁’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 교육부, 특히 진보 정권의 교육부는 공교육 강화를 명분으로 사립학교의 건학이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사립학교는 건학이념이나 신앙교육보다는 권리 주장에 더 집중함으로써 기득권 수호 집단이라는 오명을 자초하고 있는 측면도 있다. 새 정부의 교육부는 편견과 관료주의를 넘어 각 교육 주체들과 라운드테이블에 앉아 새로운 시대를 상상하는 열린 대화로부터 출발하길 기대한다.

장동민 교수(백석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