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요환 목사의 새벽묵상] 받아 누림

입력 2025-05-21 00:31

역사적으로 개인의 정체성은 주로 관계를 통해 확인됐습니다. 가족 공동체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정체성과 삶의 의미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완전히 다른 접근을 합니다. 대부분 문화권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그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졸업식에서 흔히 듣는 축사를 생각해 보세요. “당신의 마음을 따르라.” “당신의 꿈을 좇으라.” “누가 뭐라 하든 당신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하라.” 이런 슬로건들은 오늘날 대다수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바라보는 방식을 대변합니다. 현대인들은 정체성을 개인의 내면 혹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팀 켈러 목사는 저서 ‘답이 되는 기독교’(두란노)에서 현대인의 이러한 자기중심적 접근 방식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첫째 인간의 마음 혹은 내면의 목소리라는 것은 극도로 불안정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서로 충돌합니다. 심지어 하루에도 수차례 바뀝니다. 올해의 마음과 내년의 마음이 다릅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평생에 걸친 자기 발견과 ‘자신답게 사는’ 여정에서 결국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지속적인 감각이 사라지는 지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감각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합니다. 마치 종이처럼 얇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불안정합니다.

둘째 개인의 정체성을 자기 마음에서 찾는 현대적 접근 방식은 불안정할 뿐만 아니라 매우 힘들어서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자기 마음을 따르고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기 정체성을 갖춘다는 건 일정 수준의 성공을 달성해야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소리 혹은 내면의 음성이란 개인의 욕망과 꿈을 담기 때문입니다. 이를 테면 기업에서 성공하고, 억대 연봉을 벌고, 소셜 미디어에서 많은 팔로워와 ‘좋아요’를 얻고, 대중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특별한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자녀를 성공적으로 키우는 것들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이러한 것들을 마음으로 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실제 가치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선 필요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회사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지만 원하는 만큼 승진을 못 하거나 실직하게 된다면, 사회활동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았지만 노력해도 사회가 나아지지 않는다면, 좋은 부모가 되는 것으로 삶의 가치를 찾았는데 자녀가 인생에서 끔찍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내 정체성은 어떻게 될까요. 글쎄요. 산산이 조각나 버릴 것입니다. 추구하는 목표에서 조금이라도 실패한다면,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은 거의 무가치한 존재가 됩니다. 내면의 음성을 잘 듣는 것으로 인생의 정체성이나 의미를 찾는 건 너무 불안한 시도이며 깨지기 쉽습니다.

잠언 4장 23절은 말씀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우리의 마음은 인생을 걸고 따라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도리어 지켜야 할 대상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길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야 합니다. 무엇으로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정체성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성도요, 새로운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요,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이 모든 것은 받아 누리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성취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것은 불안정하고 너무 버거운 일입니다. 뭔가 증명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훨씬 더 좋은 길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의 성취를 통한 방법이 아니라 받아들임으로 누리는 정체성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39)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큰 역설입니다.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불안정하고 힘겨운 정체성 추구를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삶을 잃어버릴’ 때에 비로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치관을 ‘찾고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허요환 안산제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