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변하는 세계정세를 보면 정의와 평화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에는 구원 언약 거룩 은혜 등과 같은 개념들이 정의와 평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씀합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평화를 해칠 수 있고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정의의 수위를 조절해야 할 때도 있어서 그것을 함께 실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은 정의와 평화가 포옹해 그 열매를 거둘 때까지,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세 본문 속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군가 죄에 빠지더라도 의를 세우는 방법은 온유와 섬김을 통해 평화롭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미가 예언자도 누구보다 강한 어조로 불의를 고발하고 서릿발 같은 심판을 강조했지만, 결국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고 진노와 노여움 대신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분이라고 선언합니다. 음행하다 잡혀 온 여인도 율법대로라면 형벌로 다스려야 하지만 예수께서는 용서를 택하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장면에 대해 자신의 아내가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해야 한다면, 결국 죄를 부추기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평화로운 정의나 의로운 평화를 이룩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성경이 강조하는 정의와 평화에 주목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정의(미슈파트 체다카)는 사법적인 공의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 공정하고 단호하게 법을 집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의 정의는 오히려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편애나 호의를 의미합니다. 누군가를 유달리 사랑하고 도와준다면 그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대상은 과부 고아 나그네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성경에서 평화를 가리키는 샬롬이라는 단어는 전쟁이 없는 상태나 마음의 평안을 넘어 전체와 통합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따라서 성경은 더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정의와 평화를 강조합니다.
성경은 몇몇 개인이나 사회의 한 부분이 아니라 모든 이들과 온 세상을 위해 정의를 실천하고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부패한 사회에 대해 심판을 말하다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했던 미가 예언자나, 한 개인의 죄를 말하면서 공동체 전체의 선한 일을 언급했던 사도 바울도 비슷한 이유였습니다. 엄정하게 법을 집행하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여인이었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용서해 주시면서 한 개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허물을 지적하셨습니다.
주님이 행하신 공의와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평화는 세상의 것과 같지 않습니다. 공정한 재판과 처벌도 중요하지만 이 땅의 상처받은 모든 이들을 감싸 안는 정의가 하나님의 ‘미슈파트’와 ‘체다카’입니다. 세상은 폭력과 전쟁을 통해서라도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적군과 아군을 넘어 모든 이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 기도하며 노력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샬롬입니다.
우리는 민족과 신분을 넘어 모두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이며 그 성령을 호흡으로 삼아 같은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고전 12:13, 엡 4:4) 그 소망 가운데 정의의 강물을 흐르게 하고 평화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임영섭 목사(경동교회)
◇경동교회는 서울 중구에 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교회입니다. 1945년 광복 직후 설립됐으며 에큐메니컬 정신과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