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지나간 음(音)은 지나간 대로

입력 2025-05-30 00:30

음악을 제대로 배우기 시작하면 ‘패싱 노트(passing note)’라는 개념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화성(和聲)의 주요 음이 아닌 그저 지나가는 음이다.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음, 조화에 끼지 못한 음. 어떤 기준에서 보면 불필요하거나 틀린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바로 그 패싱 노트가 음악을 감동으로 이끈다. 화성과 화성 사이를 연결하는 불협화음과 협화음의 다리 같은 존재다. 그 짧고 낮은음이 없다면 음악은 평면이 되고 만다. 긴장과 해소, 떨림과 확신, 방황과 귀환이라는 이야기 구조는 패싱 노트의 존재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이를 가지고 신학을 풀어갔던 제레미 벡비에게 음악은 한마디로 ‘신학을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신학을 감각하게 만드는 언어’다. 우리 인생에도 패싱 노트 같은 시간이 있다. 잘못된 결정, 씻을 수 없는 실수, 부끄러운 과거….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들을 지나가는 오류로 남겨두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 순간들을 선율 안으로 끌어들여 그것 없이는 완성되지 않을 아름다움으로 바꾸신다. 피아니스트가 잘못 누른 건반 하나를 감각적으로 살려 다음 화성과 연결시키듯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까지 그분의 교향악 속에 꿰어 넣으신다. 실수이되 의미가 되고, 불협이되 조화가 된다. 칼 바르트는 이를 두고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를 통해 역사하신다”고 말했다.

성경은 그 은혜를 살아 있는 이야기로 전한다. 요셉은 형들의 악한 의도라는 ‘패싱 노트’를 지나 총리가 됐고, 가족을 살렸다.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던 과거라는 ‘불협화음’을 통과해 이방의 사도가 됐다. 탕자는 집을 떠나 방황함으로써 비로소 집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음악적 용어로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주요 화성으로 가는 길목에서 일시적 경과음이 된 셈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음을 흘려보내지 않으시고 작품 전체를 바꾸는 열쇠로 삼으신다.

때로 우리는 순탄한 단성적인 선율(monophonic)을 선하게 여기지만, 하나님은 그 안의 어처구니없는 불협화음조차 기묘하고도 생생하게 다성적 증언(polyphonic witness)으로 엮어내시는 분이다. 신학자 다니엘 밀리오리가 말했듯 하나님의 계시는 예기치 않은 듀엣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로마서 8장 28절은 그 신비를 이렇게 선포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서 ‘모든 것’에는 의도하지 않은 실패와 상처도 포함된다. 주음이 아니라 패싱 노트 같았던 순간들, 조화가 아니라 혼돈처럼 들렸던 그 부끄러운 시절들도 하나님의 악보 안에서는 고스란히 불가결한 선율이 되게 하시니! 이처럼 재형성은 하나님의 주전공이다. 우리의 깨어진 조각들을 새롭게 구성하고, 잠시 벗어난 음들까지도 전체 하모니 속에 어우러지게 하시는 분,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더 깊고 성숙한 조화로 이행하신다. 신앙 안에서의 회복은 원래보다 더 아름답게 울리게 마련이다. 오늘, 이 땅에 가득한 불협화음들조차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율 안에 패싱 노트로 경이롭게 엮어 가실 것을 기대한다.

개인의 인생과 세계 역사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때로 예기치 않은 음에서 시작되곤 한다. 그리고 그 한 음은 속삭인다. 속절없이 지나가는 것만 같았던 내 인생의 한 조각조차 하나님의 손에선 결단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패싱 노트의 손길이 있어서 지나간 어떤 음도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가수 김민기가 흐느꼈을 “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던, 서럽고 쓰리던 지난날들도” 천국 교향곡의 선율로 연주하시는 주님의 전능하신 손끝 아래서는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송용원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