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만 달러를 지원한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클린턴 재단은 범죄 기업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16년 10월 대선 토론회에서 상대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향해 이렇게 비판한 적이 있다. 클린턴이 카타르 등 중동 국가로부터 ‘클린턴 재단’을 통해 수백만 달러의 후원을 받았다며 ‘본질적으로 부패한 거래’라고 했다. 8년이 지난 지금 트럼프는 카타르 왕실로부터 4억 달러(약 5600억원)짜리 초호화 항공기를 받아 대통령 전용기로 쓰기로 했다. 명목상으로는 미국 국방부가 항공기를 이전받는다지만, 트럼프 퇴임 이후에는 미국 정부가 아닌 ‘트럼프 도서관’으로 소유권이 넘어간다. 트럼프는 퇴임 후에는 그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트럼프는 어제 했던 말과 오늘 하는 말이 다른 정치인이다.
왕은 나라를 소유하지만, 대통령은 나라를 운영한다. 대통령이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한시적으로 위임받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최고 권력자라도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따로 있다. 대통령이 다른 나라 정상에게 수천억원짜리 선물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주는 일도 웬만해서는 할 수 없는 일에 속한다. 오직 왕과 군주들이 이런 선물을 주고받는다. 트럼프에게 선물을 준 국가도 카타르, 왕이 지배하는 군주 국가다. 트럼프는 2기 첫 순방지로 군주가 통치하는 중동 지역을 선택했고, 왕들로부터 왕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왕이 왕가를 거느리는 것처럼 트럼프는 트럼프 일가와 함께한다. 중동에서는 트럼프 아들들이 트럼프의 이름으로 사업을 하고 있다. 카타르에서는 55억 달러 규모의 트럼프 골프 리조트 건설이 계획돼 있다. 아랍에미리트의 한 펀드는 트럼프가 만든 암호화폐 회사인 ‘월드리버티파이낸셜’에 20억 달러를 투자했다. 트럼프 1기 당시 백악관 선임고문으로 일했던 사위 재러드 쿠슈너는 사우디 국부펀드에서 약 20억 달러를 유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을 위한 국익과 트럼프 일가를 위한 사익이 뒤섞였다.
트럼프가 미국의 군주처럼 군림하는 것은 견제할 민주적 장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백악관과 내각에는 충성과 아첨을 경쟁하는 ‘신하’들이 넘쳐난다. 팸 본디 법무장관은 트럼프의 4억 달러 선물 수수가 아무 문제가 없다는 법적 검토를 해줬다. 캐럴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트럼프는 미국 국민의 이익만을 염두에 두고 일하고 있다”며 고장 난 녹음기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여당인 공화당은 친(親)트럼프 충성파들로 채워졌고, 야당인 민주당은 대선 패배 이후 지리멸렬한 상태다. 권력을 비판하는 기성 언론 대신 “대통령님,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하시냐”고 묻는 ‘내시 언론’이 먼저 질문 기회를 받는다. 사법부만이 민주주의 최후의 방패로 남아 때때로 트럼프를 막아서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트럼프가 ‘바이든 판사’로 소셜미디어에 낙인을 찍으면 ‘마가’(MAGA·트럼프 극렬 지지층)들이 나서서 재판부를 초토화해 버린다.
무엇보다 트럼프를 ‘묻지마’ 지지하는 40% 남짓 미국 국민이 트럼프를 왕으로 만들고 있다. 그들은 수많은 추문과 사법리스크에도, 2021년 의사당 폭동 사태를 선동한 잘못에도, 다시 트럼프에게 최고 권력을 넘겨줬다. ‘모든 국가는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는다’는 말처럼 미국은 지금 미국 수준에 맞는 정부를 만들고 있다. 트럼프와 지지자들은 위대한 미국으로의 전진으로 여기겠지만, 관찰자의 눈에는 왕정처럼 타락하는 퇴보로 느껴진다. 트럼프는 지난 2월 뉴욕의 혼잡통행료 취소방침을 선언하며 “뉴욕 전체가 구원받았다. 왕 만세”라고 쓴 적이 있다. 유치한 자아도취 농담으로 여겼지만, 이제는 그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임성수 워싱턴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