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앞두고 찾은 청와대는
박제된 권력의 흔적과 더불어
어정쩡한 메자닌으로 다가와
현대 정치 잔혹사를 반복해온
제왕적 대통령제 종식 급한데
다수당의 1인 입법 독재로
삼권분립마저 붕괴되는 모순
믿을 건 국민 각성과 선택 뿐
박제된 권력의 흔적과 더불어
어정쩡한 메자닌으로 다가와
현대 정치 잔혹사를 반복해온
제왕적 대통령제 종식 급한데
다수당의 1인 입법 독재로
삼권분립마저 붕괴되는 모순
믿을 건 국민 각성과 선택 뿐
초록이 번지는 궁궐 담쟁이와 연보랏빛을 머금은 라일락 사이로 봄이 스쳐 간다. 5월은 늘 생명이 충만한 달이지만, 이번 5월은 사뭇 다르다. 꽃보다 먼저 피어난 조기 대통령 선거, 계절 그 자체가 정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득 청와대를 찾고 싶어졌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 내려 경복궁을 거쳐 청와대로 향하는 1.5㎞는 한 시대의 권력이 자리했던 공간을 넘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가올 정치의 계절을 잇는 회랑 같았다.
경복궁 주변은 한복 차림으로 북적였다. 어엿한 대감집 규수부터 나인이나 무관, 심지어 상감마마와 중전마마 복장까지, 조선에 태어났더라면 이 궁궐의 주인이라도 된 양 카메라 앞에서 저마다의 포즈를 취했다. 그 풍경들 너머로 또 하나의 궁, 한때 ‘통치의 심장’이라 불렸던 청와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시민에게 개방된 지 3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청와대는 박제된 권력의 흔적이 스민 ‘메자닌’ 같은 공간이었다. 프랑스 혁명으로 시민에게 돌아간 베르사유 궁전을 흉내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권력을 내준 것도 아닌 채로 머뭇대고 있었다.
본관 2층 대통령 집무실 벽면에는 역대 대통령 12인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려 있었고, 영부인 집무실엔 그들의 배우자 사진이 전시돼 있다. 하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청와대 입주를 거부하고 용산에 둥지를 튼 때문인지 그들을 기억의 목록에서 삭제한 듯 했다.
2층 대통령 집무실 벽에는 조선시대였다면 당연히 어좌 뒤에 있어야 할 일월오봉도 대신 십장생도가 똬리를 틀고 있다. 그 앞에서 몇몇 이름이 뇌리를 스친다. 장기집권에 총탄의 이슬로 스러진 박정희, 부정선거로 하야한 이승만, 국정농단으로 탄핵된 박근혜, 한밤에 TV에 나와 계엄령을 선포했다 쫓겨난 윤석열. 십장생도는 ‘장수’를 기원하건만, 1948년 건국 이래 대한민국의 권력사는 ‘덧없음’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권좌란 오래 앉아 있으라기보다는 언젠가 반드시 내려와야 하는 자리임을 웅변하는 것 같았다.
본관 뒤편 숨가쁜 언덕배기에 대통령 관저가 버티고 서 있다. 조선시대 아담한 대갓집을 연상케 하는 이곳은 낮은 담장과 우아한 처마, 정갈한 정원수와 물받이 장식이 유난히 눈부셨다. 너무도 섬세하고 고요한 탓인지 오랫동안 누군가 이별 준비를 해온 듯 애처로움이 간절했다. 관람객 중 누군가 “그래도 이 곳은 참 좋은데”라고 속삭이는 외마디가 그래서 더 쓸쓸하게 들린다.
본관 한쪽 벽을 가득 채운 병풍 하나엔 “국민은 나라의 주인이다”로 시작하는 문장이 힘 있는 붓놀림에 실려 내달린다. 그 웅변이 클수록 병풍 너머 침묵은 더 짙게 드리워졌다. 정말 청와대는 온전히 국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일 뿐일까.
청와대는 현대사의 권력 투쟁의 생채기로 남아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광화문 집무실 시대를 약속했지만 끝내 지키지 못했고, 윤석열 전 대통령은 용산으로 떠났으며, 이재명 후보는 당분간 청와대를 사용하되 새로운 대통령실을 세종시에 짓자고 한다. 각기 다른 방향이지만 공통된 건 청와대는 지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기억과 권력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다는 점이다.
청와대를 이런 유산으로 남기지 않으려면 개헌이 지금이 마지막 기회가 돼야 한다. 직선제 도입 이후 38년, 민주주의의 진전만큼이나 대통령 불행사가 반복된 건 제왕적 권력 구조 때문이었다. 늦었지만 대선 후보들이 개헌론을 꺼낸 만큼 폐단을 해소할 방안을 찾아야 마땅하다. ‘연임이냐 단임이냐’보다 더 중요시 해야 할 것은 그 권력을 누구의 것으로, 어떤 방식으로 분산시킬 것인가 하는 근본적 물음이다. 1인을 위해 사법부까지 삼권을 장악하려는 다수당 독재가 한창인 상황에서 개헌 주장은 제왕적 권력을 연장하려는 또 다른 꼼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집으로 향할 즈음 구 본관 앞마당 간이 무대에서 재즈 오케스트라의 경쾌한 연주가 울려퍼진다.
‘시간이 당신의 길을 바꿔줄 거라 믿는다면, 너무 오래 기다리지 마세요.’
마들렌느 페이루가 부른 노래 ‘Don’t Wait Too Long’의 가사가 청와대 출구로 향하는 비탈길 아래 방문객들에게 재촉하는 듯했다. 지금이야말로 진정 청와대를 ‘국민의 품’으로 되돌릴 때라고.
이동훈 논설위원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