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교회학교에서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무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유두고라는 사람이 설교 시간에 졸다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말씀을 전하던 전도사님이나 교회 선생님도 ‘설교 말씀을 잘 안 듣고 딴짓하면 이렇게 될 수 있다’라고 겁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른이 돼 이 말씀을 다시 읽으니 그때와는 사뭇 다른 묵상 거리가 생깁니다.
어른이 되어 오늘 본문을 읽으니 여기서 가장 궁금한 것은 ‘왜 위험한 곳에서 졸고 있는 유두고를 아무도 깨우지 않았을까’입니다. 그 생각을 하며 본문을 천천히 읽어보니 그날 그곳에 모인 모두에게는 유두고를 깨우지 못한 각자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위험한 창가에서 졸았던 유두고 자신입니다. 졸다가 떨어졌으니 자신의 책임이 가장 크지요. 그런데 유두고는 아마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다가 모임에 늦게 왔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먼 자리에서라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했지요. 그러나 몸이 마음을 따르지 못해 창가에서 졸다 떨어졌습니다.
다음은 말씀을 전하는 바울입니다. 청중이 졸면 발표자가 깨워야지요. 그러나 바울도 사정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드로아로 와서 한 주간 머무르며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길을 떠나려 했고 복음을 전할 내용도 많아 마음이 급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설교를 들으며 조는 유두고를 깨우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곳에 모인 성도들인데 성도들도 각자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당대의 복음 전파자인 바울의 설교와 강론에 대해 갈급했을 것이고, 질문과 함께 자신들의 생각도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두고까지 신경을 쓰지 못했을 것이지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각자의 사정이라는 범위 안에 있을 때 공동체에서 한 생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9절은 “일으켜보니 죽었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저자이며 의사인 누가의 표현입니다. 이를 보더라도 유두고는 분명 죽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은 유두고를 안으며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의사는 죽었다고 선포하지만 복음 전파자인 바울은 생명이 있다고 선포합니다. 이는 유두고가 분명 졸다가 떨어져 죽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범위 안에 있었기에 죽지 않은 것입니다. 성도가 낙심할 수도 졸 수도 있지만, 말씀이 선포되는 범위 안에 있으면 생명이 지켜지는 것이지요.
이 일이 있고 나서 드로아 공동체는 함께 떡을 떼고 대화를 나누면서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습니다(12절). 이는 각자의 범위 안에 머물다가 구성원의 생명을 잃었는데, 그래도 말씀이 들리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기에 생명을 다시 찾을 수 있었고 그래서 이들은 비로소 진정한 예수 공동체의 범위 안으로 들어와 서로를 살피고 먹고 나누며 말씀이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있다는 것으로써 위로를 주고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각자의 사정이라는 범위에만 머무르면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이 들리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음으로 예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주신 새로운 생명을 서로 살피고 먹이며 위로하는 교회 공동체 범위 안으로 들어오시기를 기원합니다.
남요한 김해 소금과빛교회 목사
◇남요한 목사는 지난해 경남 김해에서 소금과빛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소빛마당과 벨 영성 훈련원에서 선교와 상담 협력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교회는 매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예배하고 지역 산업공단에 있는 기업들과 업무협약을 맺어 사내 복지 프로그램(직원 상담과 직장 알파 코스)을 제공하며 하나님 나라 확장에 힘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