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후보는 지난달 27일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직후 수락 연설에서 “정치의 사명이자 대통령의 제1 과제인 국민 통합의 책임을 확실히 완수하겠다”고 공언했다. 90%에 육박하는 사상 최고 득표율로 ‘기호 1번’ 대선 주자가 된 강자의 여유가 묻어났다. 서쪽을 평정한 기세를 몰아 이제 중원을 넘어 동쪽으로 나아가겠다는 출사표이기도 했다. “이 순간부터 이재명은 모든 국민의 후보입니다.” 이날 이 후보의 입에선 통합이 14번이나 외쳐졌다.
그런데 그 닷새 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이 후보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파기환송을 하면서 기류가 급변했다. 이 후보는 “아무것도 아닌 해프닝”이라며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민주당은 가만있지 않았다. 대법원을 향해 “3차 내란 기도” “사법 쿠데타” 등의 말폭탄이 투척됐다. 특검법 발의, 청문회 개최 같은 사법부 수장의 사퇴를 압박하는 실제 행동도 이어졌다. 유죄 취지 선고에도 여론 동요가 크지 않고 오히려 지지층 결집 현상이 나타나자 판결과 거리를 두던 이 후보도 적극 공세로 돌아섰다. 대법원이라 할지라도 언제든 내란 딱지가 붙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 후보는 공식 대선운동 첫날인 지난 12일 출정식에서 “대통령의 제1 사명은 국민 통합”이라고 다시 한번 통합을 역설했다. 동시에 이 통합의 대상에서 내란 세력은 제외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문제는 내란 세력을 가르는 기준이 자의적이라는 점이다. 더욱이 내란 세력의 범주는 시간이 갈수록 확장되는 모습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과 계엄 사태 가담자들에서 시작해 국민의힘과 반탄 진영을 거쳐 민주당에 반대하거나 집권에 방해가 되는 세력으로까지 대상이 넓어지고 있다. 내란 종식이란 말의 의미도 계엄 진상 규명과 연루자 엄중 처벌 수준을 넘어 이제는 ‘기득권 타파’ 같은 프로파간다의 성격도 띠는 것으로 보인다.
내란 세력의 범주가 넓어질수록 통합의 대상은 좁아지기 마련이다. 많은 국민이 민주당의 행보를 두고 정말 통합의 길을 가는 것인지, 내란 종식의 끝은 어떤 모습일지 의문을 제기하고 한편으론 두려워하는 이유다.
민주당은 이번 대선판을 끝까지 내란 심판론 프레임으로 끌고 가겠다는 뜻이 확고하다. 그리고 현재 이 후보의 지지율 질주를 봤을 때 이런 전략은 성공적인 상황이다. 다만 내란 규정의 무한 확장은 선거 승리 전략이자 지지층을 향한 수사 정도에서 머물길 바란다. 통합을 외치며 동시에 반대편에 대한 배타성을 내뿜는 모순의 결과가 어떤지는 과거 사례에서도 숱하게 봐왔기 때문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5월 10일 “이날은 진정한 국민 통합이 시작된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는 취임사와 함께 임기를 시작했지만, 그 뒤에 기다린 건 가차 없는 적폐 청산과 그것이 초래한 국민 분열이었다. 윤 전 대통령은 야당을 비롯해 정권 반대 진영을 모두 ‘반국가 세력’으로 묶고, 또 이 범주를 계속 확장해 나가다가 결국 계엄 선포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중요한 건 대선 이후다. 민주당이 만약 집권한다 해도 ‘너는 내란 세력이냐, 우리 편이냐’ 묻기를 이어가며 편 가르기를 한다면 협치는 멀어지고 국민 분열은 심화할 수밖에 없다. 통합은 일통도, 일색도 아닌 것이다.
“세상이 왼쪽 날개도 있고 오른쪽 날개도 있어야 나는 거지. ‘우리하고 입장 다르면 싹 제거하고 우리끼리만 남겠다’가 가능합니까. 존재를 인정하고 공존해야 합니다.”
다름 아닌 이 후보가 지난 14일 경남 창원 유세에서 한 말이다.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을 겨눈 것이지만, 이 후보 자신과 민주당에 던져야 할 말이기도 하다.
지호일 정치부장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