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없는 사교육비… ‘AI 수능 문제은행’이 게임 체인저 될 수도

입력 2025-05-21 00:05
한 수험생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200일 앞둔 지난달 27일 서울 강남구 한 학원에서 인터넷 강의를 보며 공부하고 있다. 사교육비는 매년 불어나고 있지만 정부는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교육 경쟁력 강화·입시제 개편
현실적으로 모두 쉽지 않은 방안
AI 교과서 등 현장선 호응 미지근
30여년 수능 자료 축적한 공교육
제대로 활용 땐 사교육 제압 가능

공교육은 사교육에 완패하고 있습니다. 사교육비가 매년 역대 최대치를 갈아 치우고 있죠. 사교육비 총액, 학생 1인당 사교육비, 사교육 참여율, 사교육 참여 시간 등 모든 지표가 매년 최악입니다. 사교육은 공교육의 보완재가 아니라 대체재로 입지를 굳히는 중입니다. 국가가 공교육에 매년 100조원 넘게 투입하는 상황인데도 개선될 기미는 없어 보입니다.

이유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학교는 공급자 위주, 사교육은 수요자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아이를 보내고 있다면 많이들 공감할 겁니다. 학원은 애초에 수준별 강의가 기본입니다. 레벨 테스트를 통해 측정된 학업 성취도에 따라 같이 공부하는 그룹을 결정합니다. 또 정기적으로 레벨 테스트를 거쳐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승강제 역시 일반화돼 있습니다. 반면 공교육은 대부분 ‘랜덤’입니다. 그래서 함께 수업을 듣는 학생 수준은 천차만별입니다.

선행학습을 통해 심화 학습이 필요한 아이들과 기초 학력이 부족한 아이들이 섞여 있는 학급에선 교사의 노력은 벽에 부딪히기 십상입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 기초학력이 부족한 아이들 양쪽 모두에게 학교는 지루한 공간입니다.

덧붙여 사교육 강단은 ‘정글’입니다. 학생과 학부모, 동료, 사교육 경영진까지 평가는 냉혹합니다. 삐끗하면 ‘아웃’됩니다. 대신 인센티브는 아주 확실하죠. 강의가 좋기로 소문나면 사교육 업체들의 영입 경쟁을 벌이고 몸값은 천정부지로 뜁니다. 냉혹한 ‘프로의 세계’입니다. 임용고시 합격과 함께 정년이 보장되는 공교육과 긴장감이 다릅니다. 공교육이 사교육을 이기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닐지요.

여기까지 들추면 어김없이 이런 반론이 등장합니다. ‘학교는 전인교육의 장이지 입시 준비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다.’ 옳은 말입니다. 응당 그래야 하지요. 하지만 입시는 현실이고 경쟁은 필연입니다. 직업 세계에서 학벌의 위력을 느껴본 학부모들에겐 한가한 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교육비 해법은 결국 공교육의 경쟁력 강화입니다. 사교육에 굳이 지갑을 열 필요 없을 만큼 공교육이 경쟁력을 갖춘다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소됩니다. 입시 제도를 고쳐 공교육과 사교육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방식도 있을 겁니다. 사교육이 공교육을 보완하는 역할에 그치도록 제도를 설계하는 것이죠.

둘 다 어렵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공교육은 사교육을 이기기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입시제도 개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교육은 빠르고 유연합니다. 대입 제도 변천사를 들여다보면, 공교육이 새 제도에 우왕좌왕할 때 사교육은 학생·학부모에게 발 빠르게 대안을 제시해왔습니다. 과도기 특수도 그들 몫이었죠. 최근 수능 논·서술형 문항 도입 논의도 당국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바로 논술 사교육 폭증입니다.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만 포기는 곤란합니다. 사교육비는 학생·학부모를 고통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공정’이란 가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이슈입니다. 저출생과 노인 빈곤 등 여러 사회적 난제들과도 직·간접적으로 맞닿아 있기도 합니다.

교육계에서 ‘인공지능(AI)이 해법이 될 수 있다’란 주장이 고개를 든 배경입니다. 진보 교육감이 있는 경남 교육청(아이톡톡)을 필두로 각지에서 AI를 활용한 맞춤형 수업에 대한 논의가 줄을 이었습니다. 교육부는 AI 교과서를 추진했고 올해부터 일부 과목에 도입했습니다.

아이톡톡이든 AI 교과서든 의미 있는 시도라고 봅니다. 사교육에 꽉 붙들려 있는 현실을 타개해보려는 적극적인 움직임이니까요. 하지만 공교육의 벽은 높아 보입니다. 교사들의 호응은 뜨뜻미지근하고, 학부모들은 사교육을 통해 이미 접한 AI 학습 프로그램들과 차별성을 느끼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AI 교과서는 도입 초기여서 예단하고 싶진 않습니다만, 고교에서 활용도가 높지 않다는 점은 명확해 보입니다. 고교에선 대입 때문에 진도를 압축적으로 나가고 수능이 가까워질수록 문제 풀이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으니까요.

여러 사교육 영역이 존재하지만 정점에는 역시 수능이 있습니다. 고교 사교육비는 초·중학교를 압도하고 매년 새 기록을 갈아치우는 중입니다. ‘고교 4학년’으로 불릴 정도로 흔해지고 있는 n수생과 그 학부모들이 짊어지는 사교육비는 통계조차 잡히지 않습니다. 정부가 n수생 통계를 만들어보겠다고 했지만 감감무소식이죠.

수능 킬러문항으로 유명해진 한 재수 기숙학원은 고급화 전략을 들고나와 월 400만~450만원을 받고 있습니다. 다른 기숙학원들도 대동소이합니다. 국·공립대 1년 등록금을 매달 가져다 바쳐야 하는데 가려는 이가 줄을 서고 있습니다.

정부가 AI 교과서에 앞서 AI 수능 문제은행 시스템을 개발해 제공했다면 어땠을까요. 학생과 학부모 호응은 AI 교과서 도입 때와 사뭇 달랐을 겁니다. 가장 ‘가려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고교 사교육은 ‘얼마나 수능과 유사한 문항을 많이 제공할 수 있는가’로 좁힐 수 있습니다. 공교육에서 충족되지 않으니 사교육으로 달려가는 겁니다. ‘킬러문항’ 등 수능 문항 장사를 잘해 단기간에 학원 재벌 반열에 오른 곳도 있을 정도입니다.

AI를 돌리는 기반이 될 데이터베이스는 충분해 보입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는 지난 30여년 시행됐던 수능과 공식 모의평가, 교육청 모의고사 데이터가 축적돼 있습니다. 단순히 문항뿐 아니라 정답률 같이 당해 수험생들이 각 문항에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한 자료 등 입체적인 데이터가 풍부합니다. 수능 문항 생산자로서의 권위에 더해 이같이 방대한 데이터는 사교육에서 넘보기 어려운 영역입니다. 공교육이 ‘게임 체인저’를 창고에서 썩히면서 사교육에 판판이 깨지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이도경 교육전문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