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뜨거웠던 태국 북부 딱(Tak)주. 치앙마이에서 아시안 하이웨이 1호선(AH1)을 타고 7시간 가까이 달려야 닿을 수 있는 태국의 끝자락이다. 국경과 가까운 이곳에 있는 매솟은 미얀마 내전의 긴장감이 느껴지는 곳이다.
2021년부터 계속되는 미얀마 내전을 비롯해 최근 발생한 미얀마와 카렌민족해방군(KNLA)과의 갈등으로 딱주로 가는 경비는 삼엄했다. 지난 3월 28일 람푼과 람빵 등 매솟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무장 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가 세 차례나 나타났다.
이런 긴장 속에서도 선교는 멈추지 않는다. 오영철(60) 선교사와의 동행은 살아있는 복음의 현장을 마주하는 기회였다. 오 선교사는 1995년 총회세계선교회(GMS) 파송을 받아 태국에 왔다. 치앙마이 실로암신학교 교수인 그는 목회자와 신학생 등 태국 복음화를 위한 다음세대 양육에 집중하고 있다. 또한 현지 목회자 재교육을 통해 기독교가 태국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총성 속 아이들과 ‘티써래 기숙사’
매솟에는 미얀마 피란민 4만여명이 살고 있다. 이곳에서 고아를 돌보는 무무애(56) 목사를 만나 그가 운영하는 ‘티써래 기숙사’를 찾았다. 방문 하루 전 미얀마군과 KNLA 사이에 총격전이 있었다. 학생들은 안전을 위해 태국의 다른 도시로 피신했고 기숙사에는 이들이 두고 간 짐만 남아 고요했다.
기숙사라고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건물은 아니었다. 인근에서 자라는 대나무와 유칼립투스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전통가옥이었다. 천장에는 낡은 양철지붕이 뜨거운 햇살을 그나마 막아줬고 대나무 바닥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거리며 위태롭게 흔들렸다. 수시로 비가 내리는 기후 탓에 2년마다 기숙사를 새로 짓는다고 했다.
낮음으로부터의 선교
무무애 목사가 돌보는 학생은 150여명에 달한다. 오 선교사는 기숙사가 유지될 수 있도록 무무애 목사와 후원자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오 선교사는 “현장에서 터득한 선교는 약한 자가 약한 자를 돕는 ‘낮음으로부터의 선교’”라며 “무무애 목사를 돕고 있지만, 이들에게 일방적인 지원이나 시혜적 차원에서의 도움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무무애 목사가 세운 기숙사와 교회에 속한 이들 중 70~80%는 미얀마에서 온 버마족이다. 민족 사이에 배타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카렌족 출신인 무무애 목사가 버마족을 섬기는 셈이다. 오 선교사는 “무무애 목사가 경제적으로 풍족해 한국인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게 아니”라며 “태국에 복음을 뿌리내리기 위해 자립의 길을 고민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미얀마와 인접한 매솟에서는 밤낮없이 총성을 들을 수 있다. 미얀마군이 쏜 총알이 태국 쪽으로 날아오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가 이곳을 지키는 이유가 궁금했다. 무무애 목사는 “카렌족과 이웃인 버마족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며 “미얀마 국경을 넘어가지 않더라도 이곳으로 피란 온 미얀마 사람을 돌보고 복음을 전할 수 있어 오히려 좋다”며 반색했다. 이어 “전쟁 전 국경 넘어 미얀마에서 만난 이들이 나를 믿고 자신의 자녀를 매솟으로 보내기도 했다”며 “내게 맡겨진 다음세대를 교육하고 이들에게 평화로운 미래를 제공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산골 마을의 선교적 교회
오 선교사가 뿌린 선교의 씨앗은 곳곳에서 자라고 있다. 치앙마이 산골 마을에 있는 매쁘이키교회는 ‘태국의 지붕’이라는 별명을 가진 ‘도이인타논 산’ 가까이에 있다. 이 마을에 사는 600여명이 선교 대상이다. 교회로 가는 길은 험했다. 낭떠러지 옆을 따라 만들어진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 시간가량 달리자 빽빽한 숲 사이에 자리 잡은 목조 교회가 나타났다.
매쁘이키교회는 지난해 12월부터 아르헨티나에서 온 줄리오 마틴 바예호스(50)와 셀리아 노에미 트론코소 센드라(53) 선교사 부부를 후원하고 있다. 가난한 산골교회가 십시일반으로 또 다른 후원을 하는 것이다. 이 교회 담임 무카(58) 목사는 오 선교사에게 선교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오 선교사는 “교회가 가진 최선의 방식으로 섬기는 게 바로 선교라고 답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선교 대상 국가에서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익숙해져 자립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러나 이 교회는 자립하는 것을 넘어 선교를 실천하는 교회로 성장했다”고 전했다.
1987년 이후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중남미 국가들은 교세 성장을 경험하고 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바예호스 선교사 부부가 태국의 지붕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파송한 아르헨티나의 교단 상황이 좋지 않아 제대로 된 후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이 가난한 이유이고, 매쁘이키교회가 이들의 선교 후원에 나선 이유이다.
바예호스 선교사는 “이 교회가 개척하고 성장한 뒤 선교에 참여하는 속도가 빠르다”며 “선교에 참여한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카렌족을 보면서 선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밝혔다.
다음세대, 적극적인 주체로 세워
매쁘이키교회는 다음세대 사역에서도 본보기가 되고 있다. 이날 예배가 시작되자 미취학 아이들이 헌금함을 들고 나오고 특별찬송은 청소년들이 맡았다. 형식과 고정관념을 내려놓은 교회는 다음세대를 교회의 주역으로 세우고 있었다.
무카 목사는 “예수님의 몸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이 바로 교회”라며 “우리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신앙 공동체”라고 소개했다. 이어 “남·여전도회와 청년회 등 평신도 선교회가 균형 있게 서 있다면 그게 바로 건강한 교회”라고 덧붙였다.
오 선교사는 “이전에 선교사란 미국이나 한국에서 온 외국인 사역자들이 카렌 교회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역할이었다”며 “하지만 이제는 달라지고 있다. 태국 오지에 심긴 복음이 또 다른 선교의 여정으로 뻗어 나가고 있어 보람이 크다”고 말했다.
“태국어 유창한 카렌족, 자생적 교회 키워내… 잠재력 대단”
오영철 선교사 인터뷰
오영철 선교사 인터뷰
“오추오클래아(안녕하세요. 잘 지내셨나요).”
오영철(60) 선교사가 카렌어로 인사를 건넸다. 오 선교사는 30년 전 태국 선교를 시작할 때 2년이 넘도록 집중적으로 카렌어를 배웠다. 카렌족의 시선에서, 그들을 위한 선교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200곳이 넘는 카렌족 마을을 직접 방문해 현지 상황을 살피고 자생적 교회들의 장점과 한계를 분석했다.
이런 연구 끝에 오 선교사는 태국 선교 7년 만에 ‘약자를 통해 강자를 부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교 의미를 깨닫게 됐다. 오 선교사는 “현지 교회가 주체적으로 사역에 참여하지 않으면 외부에만 의존하게 돼 지속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 선교사들이 무의식중에 한국인의 시선으로 접근해 베푸는데 집중하던 과거 선교 방식에 대한 자성이 필요하다”며 “자립 성장하는 현지 교회와 신학교로부터 오히려 배우고 협력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했다.
오 선교사는 선교 환경의 변화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90년대 중반 한국교회와 지금의 한국교회, 서구교회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며 “더는 한국교회 부흥 공식을 선교지에 이식하는 방향의 사역을 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그는 카렌족이라는 소수민족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 역사가 변화하는 현실을 체험하고 있다.
오 선교사는 “카렌족 교회는 태국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타이족을 변화시킬 수 있는 충분한 경험과 자원을 갖추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저평가한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오 선교사는 “카렌족은 자기의 민족 안에서 성공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자립시킨 경험이 있다”며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카렌족 대부분이 태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으로 꼽힌다”고 말했다. 이어 “이들 스스로 민족을 선교 공동체로 변화시키는 일은 외국 선교사에 의한 선교보다 훨씬 빠르게 결실을 볼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기대했다.
카렌족 사이에 있으면 흡사 카렌족처럼 보이는 오 선교사는 언젠가 선교 현장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선교사는 현지 교회가 자립하고 그들만의 전통에 뿌리내린 신앙을 확산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주면 할 일을 다 한 것이죠. 그런 뒤엔 떠나야죠.”
딱·치앙마이(태국)=글·사진 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