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항만 크레인 업계는 한국 당국의 지원과 미국 정부의 중국산 배제라는 겹호재를 사업 확장의 기회로 삼고 있다.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이 직접 미국 측과 만나 항만 크레인 협력을 논의하는 등 국내 관련 업체들의 북미 진출 가능성이 커지는 중이다. 항만 크레인은 항구에서 컨테이너나 화물을 배에 싣고 내리는 초대형 크레인이다.
미 정부는 지난해 자국 항만에 설치된 중국산 크레인을 모두 교체하겠다는 방침을 밝혔고, 미국무역대표부(USTR)는 지난달 중국산 항만 크레인에 대한 관세를 기존 25%에서 100%로 상향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은 중국산 크레인이 미국 물류 정보를 불법적으로 수집하는 ‘트로이 목마’로 쓰일 수 있다고 본다. 미국 내 항만 크레인의 약 80%를 차지하는 중국 ZPMC 제품 퇴출이 본격화하면 대체품을 공급할 수 있는 한국 업체들에 발주가 쏟아질 수 있다.
2000년대 들어 중국산 저가 공세로 사실상 고사(枯死) 상태였던 국내 항만 크레인 업계는 최근 정부 지원을 바탕으로 회복세를 보이는 중이다. 기업들은 여기에 더해진 미국발 호재에 올라타 성장을 가속한다는 방침이다. HD현대삼호는 지난 2020년 부산신항 7부두에 크레인 9기를 공급했는데, 부산신항에 국산 항만 크레인이 채택된 건 20년 만이었다. 그전까지 설치돼 있던 크레인 69기는 모두 중국산이었다. HD현대삼호는 이 공사의 성공적 수행을 바탕으로 지난해에도 부산항만공사로부터 1796억원 규모 계약을 따냈다. 정 수석부회장은 지난 16일 제이미슨 그리어 USTR 대표를 만나 HD현대삼호의 크레인 제조 역량을 소개하기도 했다.
현대힘스는 HD현대삼호에 항만 크레인용 철골 구조물을 납품하는 전문 외주 제작사로서의 입지를 공고히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지난해 9월 300억원을 투자해 관련 생산기지를 확보했다. 두산에너빌리티도 베트남 법인 두산비나를 통해 2023년 26기, 지난해 24기의 항만 크레인을 수주했다. 지난해 부산신항 크레인 제작 사업을 수주한 HJ중공업은 미국 진출을 검토 중이다.
해양수산부는 지난 2023년 ‘항만기술산업의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공포했다. 이 법엔 국산 항만 크레인 우선 사용, 관련 기술의 실증 지원, 전문 인력 양성 등 내용이 담겼다. 정부는 2031년까지 항만 장비 국산화율 90%, 세계 시장 점유율 10%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다. 크레인 업계 관계자는 18일 “고객사가 원하는 공사 기간에 맞춰 중량물을 제작하고 품질을 관리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며 “관련 노하우, 조직, 기술력, 재무 안정성은 한국 기업의 강점”이라고 말했다.
황민혁 기자 ok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