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카페를 연 지 5년쯤 됐을 무렵이었다. 출근 전, 아들 정환이가 잠시 나를 보기 위해 카페에 들렀다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봉천동은 거리도 멀고 시간도 여의치 않습니다. 아파트를 정리해 서대문으로 오시면 오가며 자주 찾아뵐 수 있습니다. 저희 삼남매를 키워주신 어머니를 불편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네, 간병인을 둘 여유가 있으시다면 그러셔도 좋습니다.”
누구 전화길래 이렇게 받나. 통화를 마친 아들에게 물었다.
“아버지랍니다.”
나는 어떻게 남편과 연락이 닿게 됐는지 아들에게 묻지 않았다.
“그런데 왜?” “아픈데 옆에서 간병해줄 사람이 없나 봐요.”
남편을 마지막으로 만난 건 내가 무료야간진료소에서 일하던 때였다. 당시 박근혜 총재가 공식 일정마다 나를 동행하면서 부총재로 불린 덕에 나도 언론에 자주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청와대 비서실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결려왔다.
“부총재님, 어떤 남자분이 정환이 아빠라면서 바꿔 달라고 하시는데요.”
“전화 돌려라.”
나는 차분하게 그러나 냉정하게 물었다. “제게 왜 전화하셨죠?”
“할 말이 있어. ○시까지 힐튼호텔로 나와.”
나는 약속 시간에 맞춰 힐튼호텔로 향하던 중 함께 가던 비서에게 말했다.
“호텔에서 어떤 사람을 만날 건데, 만약 그 사람이 손이나 발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바로 제압해 입건시켜.”
호텔 커피숍에 들어서니 그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무슨 일로 부른 거죠. 아이들 걱정은 마세요. 제가 유학까지 책임질 겁니다. 더 하실 말씀 있나요.”
출판 일을 하던 남편은 “요즘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며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말했다.
“그런 말씀이라면 더는 들을 이유 없습니다. 김 비서, 차 시동 걸어요. 아이들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건강하세요.”
남편은 커피숍 통유리창 너머로 검은 세단에 오르는 나를 말 없이 지켜봤다. 김 비서가 문을 열자 나는 뒷좌석에 올랐고 문이 닫힐 때까지 그의 시선은 유리창에 머물렀다.
돌아오는 길, 나는 속으로 말했다. ‘제대로 봐 둬.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 날 이후 나는 남편을 다시 마주한 적이 없다.
“간병을 도와달라”는 연락이 온 뒤로 남편으로부터 더는 소식이 없었다. 그리고 5년 후, 정환이가 들꽃카페서 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저희 삼남매에게 연락하셨어야죠.” 전화를 받고 나간 아들은 저녁이 되어 돌아왔다.
“어머니, 아버지 묘소에 다녀왔어요. 1년 전에 돌아가셨고 오늘이 제삿날이래요.” 아들은 담담히 말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든 아들은 단호하게 말했다.
“저희 그런 사람들 아닙니다. 저희 어머니가 그렇게 안 키우셨습니다. 제 도장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그리고 제발 그렇게 살지 마세요.”
남편의 아내인지, 여자친구인지 모를 그 사람은 남편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있었다고 했다. 남편 재산 정리가 다 마무리될 무렵에야 아이들에게 연락했던 것이다.
비록 내게 많은 상처를 안긴 사람이지만, 끝내 외로웠을 그의 뒷모습이 문득 가엾게 느껴졌다. 나는 들꽃카페 골방에 들어가 그저 조용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정리=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