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강대국 국제정치 부활과 한국의 대응

입력 2025-05-19 00:35

美 세계 평화 전략 3대축으로
규칙 기반 국제질서 70년 유지

트럼프 자국 우선주의 등장은
주먹 앞세운 경쟁체제 신호탄

한·미동맹 여전히 중요하지만
미국 없는 자주국방 생각해야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한 지 4개월이 지났다. 2월 말에 있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정상회담 파행이 글로벌 안보 쇼크를 상징한다면, 지난달 초부터 시작된 관세전쟁은 글로벌 경제 쇼크를 상징한다. 상호 보복을 통해 미국은 중국에 145%, 중국은 미국에 125% 관세를 부과했다. 최근에는 미·중이 관세 휴전에 합의해 향후 90일 동안 미국은 중국에 30%, 중국은 미국에 10% 관세를 적용하기로 했다.

트럼프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지는 불투명하다. 다만 미국의 ‘해묵은 과제들’을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쟁점화한 것은 분명하다. 약 36조 달러(약 4경7000조원)가 넘는 대규모 국가부채, 국채 이자 비용만 1300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재정적자, 제조업 경쟁력 약화, 강한 달러와 결합된 만성적 무역적자, 과도한 해외 개입으로 인한 국력 쇠진 등이다.

문제는 미국의 상대적 쇠퇴로 세계 질서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세계 질서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 만들었다. 그 전의 세계 질서와는 무엇이 달랐을까. 미국은 19세기까지 고립주의 전통이 강했다. 1, 2차 대전 모두 참전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참전하게 됐다. 1차대전은 짐머만 전보사건과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계기로, 2차대전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참전하게 됐다.

미국은 두 차례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은 뒤 재발 방지를 위한 ‘세계 평화 전략’을 구상한다. 세계대전과 대공황 발생의 근본 원인을 강대국의 식민지 침략 경쟁, 경쟁적 보호무역에 의한 글로벌 총수요 위축, 국제 통화체제의 비협조로 인한 국제 경제 불안정으로 진단했다. 세계 평화 전략으로 ①제국주의 반대 ②자유무역 확산 ③국제 통화체제 안정을 추진한다. 2차대전 이후 제국주의 견제를 위해 유엔을, 자유무역 확산을 위해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국제 통화체제의 안정을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을 만든다.

이를테면 2차대전 이후 미국은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제국이었다. 이는 18~19세기 영국이 주도한 세계 질서와 상반된다. 영국은 제국주의적 영토 침략의 중심 국가였다. 이처럼 미국이 주도한 ‘규칙에 기반한’ 세계 질서가 작동했던 지난 70년은 인류 역사 전체에서 매우 예외적인 시기였다. 로마시대 이후 세계 질서의 본래 모습은 ‘주먹에 기반한’ 국제 질서였다.

최근 미국이 ‘자국 우선주의’를 본격화하면서 세계 평화 전략의 3대 축이 흔들리고 있다. 제국주의적 위협의 증대, 보호무역주의 확산, 국제 통화체제의 불안정 모두가 커지고 있다. 제국주의적 위협의 증대를 보여주는 방증이 ‘지정학의 귀환’이다. 지정학은 속성상 ‘지역 강대국’의 영향력을 인정하는 논리 구조를 갖고 있다. ‘주권을 중심으로’ 보는 이론체계와 상반된다.

유의할 것은 미국 역시 ‘규칙에 기반한’ 국제 질서에서 이탈하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전쟁이 대표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무역기구(WTO)와 같은 국제적인 다자주의 틀을 무시하고 개별 국가와의 협상을 선호한다. 강대국과 약소국의 협상 구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강대국 중심의 국제 정치가 작동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강대국은 자기들끼리 경쟁하지만 다른 한편 자기들끼리 타협할 가능성도 높다. 최근 미국과 중국이 145% 수준의 관세전쟁으로 격돌하다가 돌연 합의하는 게 대표적이다. 약소국들은 ‘협상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쉽다.

지정학이 귀환하고, 강대국 중심의 국제 정치가 작동할 경우 한국의 외교와 안보는 어때야 하는가. 여전히 한·미동맹은 중요하다. 다만 1970년대 안보 위기처럼 미국이 소극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주국방이다. 최악의 경우 ‘미국 없는’ 자주국방까지를 염두에 둬야 한다. 자주국방을 위해서는 일본 수준의 핵 잠재력 확보가 중요하다. 일본은 현재 미국의 동의하에 플루토늄 재처리 시설을 가동하고 있다. 유사시 핵 개발로 활용이 가능하다. 추가로 전시작전권 환수가 중요하다. 한국은 현재 작전 기획 능력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 대기업으로 비유하면 사업기획 능력이 없는 조직이다. 한·미동맹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맹신해서는 안 된다. 자칫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는’ 어리석음이 될 수 있다.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