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보면 5년간 뛴 성적표잖아요. 시장 평가를 받아보고 싶었어요.”
올 시즌 프로배구 자유계약선수(FA) 시장이 열리자마자 구단들의 관심은 일제히 ‘최대어’ 임성진(26)에게 쏠렸다. 프로선수로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생애 첫 FA, 결과는 말 그대로 ‘대박’이었다. 치열한 영입전 끝에 그는 5년간 함께한 한국전력을 떠나 KB손해보험으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8억5000만원(연봉 6억5000만원+옵션 2억원)의 계약을 맺으며 현역 날개 공격수 가운데 최고 연봉자로 우뚝 섰다.
바뀐 수식어가 아직 실감 나진 않는다. 워낙 숨 돌릴 틈이 없기도 했다. 비시즌에 돌입한 뒤에도 FA 협상과 이적, 대표팀 소집 준비 등이 맞물리면서 제대로 된 휴가조차 못 갈 정도였다. 최근 경기도 수원 KB손해보험 연수원에서 만난 임성진은 “기대에 부응하려면 일단 새 시즌이 시작해야 한다”며 “그전까지 최고의 컨디션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 군대에 가기 전에 팀에 우승 트로피를 안기는 게 목표”라고 웃어 보였다.
스승과 작별, 새로운 세터와 만남
6년 차 아웃사이드 히터 임성진은 2020-2021 V리그 신인드래프트 전체 2순위로 한국전력에 입단하면서 프로 무대를 밟았다. V리그에서 5시즌을 뛰는 동안 매번 30경기 이상을 소화했고 직전 시즌엔 득점 7위(484점), 수비 3위(4.31개), 디그 4위(1.84개) 등 공수 전반에서 맹활약했다. 고교 시절부터 꾸준히 태극마크를 달아 국제무대에서의 성장도 기대할 만하다.
실력에 스타성까지 겸비해 여러 구단의 ‘러브콜’을 받았던 임성진이 새 둥지를 고른 기준은 뭐였을까. 그는 대번에 세터 황택의의 존재감을 꼽았다. 대학 동문이자 대표팀 동료인 황택의는 FA 개장부터 임성진을 설득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황)택의 형이랑 하고 싶었던 게 솔직히 제일 컸죠. 현역 최고의 세터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상대편에 있을 때도 정말 까다로웠는데 이제 그런 세터를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제일 좋아요. 대표팀 연습경기에서 맞춰봤을 땐 정말 잘 맞았어요. 앞으로 공 많이 올려 달라고 하려고요.”
KB손해보험 특유의 ‘원팀 정신’도 그를 사로잡은 요인 중 하나다. 임성진은 “리그에서 맞붙었을 때 KB손해보험은 유독 선수들이 끈끈해 보이고 힘을 잘 합쳐서 경기를 한다고 느껴왔다”며 “선수로서 저런 분위기에서 배구를 하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왔다”고 밝혔다.
이어 “레오나르도 아폰소 감독님께서도 선수로서 더 성장시켜주겠다고 말해줬다”며 “대표팀 이사나예 라미레스 감독님과 같은 브라질 출신이라 그런지 닮은 점도 보였다”고 덧붙였다.
물론 ‘친정 팀’ 한국전력을 떠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신인 시절부터 함께했던 권영민 감독에겐 이적 소식을 알리려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임성진은 “권 감독님이랑은 코치 시절부터 ‘미운 정’이 들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 전화를 못 걸겠더라”며 “‘잘해서 가는 거니까 미안해하지 말라’면서 끝까지 많이 존중해주셨는데 참 감사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새 시즌엔 상대 팀으로 만나게 될 텐데 한국전력만큼은 이기고 싶다”며 “지지 않겠다”는 선전포고를 남겼다.
“배구를 잘하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사실 임성진은 실력보다도 빼어난 외모로 먼저 유명세를 얻었다. 인기 연애 프로그램에 출연자로 꾸준히 섭외를 받았고, 인스타그램 팔로워도 국내 배구선수 중 이례적으로 112만명에 달한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주목을 썩 즐기는 편이 아니다. 임성진은 “어렸을 땐 한순간에 SNS로 알려지면서 주목받는 게 무섭기도 했는데 지금은 얼굴로라도 알아준 거에 감사하자는 마음”이라며 “성격상 주목받는 게 좀 힘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는 그가 추구하는 배구와도 일맥상통한다. 개인 성적보다는 팀 성적을, 하나의 도드라진 강점보다는 밸런스를 좇는다. 임성진은 “배구를 시작하고 개인 성적을 신경 써 본 적은 한 번도 없다”며 “배구는 누군가는 도움을 줘야 하고 또 누군가는 도움을 받아야 하는 스포츠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제가 솔직히 무언가 하나를 뛰어나게 잘하는 선수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요새는 공수 밸런스가 좋은 아웃사이드 히터가 귀한 시대가 된 것 같기도 한데, 그렇게 팀에 꼭 있어야 하는 스타일의 선수가 되고 싶어요. 공격이든 수비든 ‘뭐 하나 잘한다’는 평가를 듣기보다는 그냥 배구를 잘하는 선수요.”
좋아하는 배구를 잘하기 위해 임성진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태도는 ‘융통성’이다. 취할 것은 취하되, 강점이라고 여겼던 것도 코트 위에서 먹히지 않는 순간 미련 없이 버린다.
서브 하나를 넣을 때도 임성진은 실험을 거듭한다. 그는 “내가 잘 때릴 수 있는 서브 위치와 토스 스타일을 찾기 위해 수시로 점검한다”며 “시즌 중에도 서브나 공격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싶으면 빨리빨리 바꾼다”고 말했다.
“100% 나의 무기라고 여기는 것도 없어요. 시즌 중에는 당장 이기는 게 중요하니까 ‘왜 안 되지?’ 생각하면서 내 걸 고집할 겨를이 없죠. 또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섭잖아요. 이 기술이 안 먹히는 걸 직전에 경험했는데도 습관적으로 동작이 나오면 그걸 최대한 없애려고 해요.”
프로 6년 차의 책임감
새 팀에서 중점적으로 훈련할 부분은 세터와의 호흡보다도 리시브다. 주전 리베로 정민수가 한국전력의 보상선수로 지명돼 팀을 떠나면서 임성진이 생각한 시즌 구상도 크게 달라진 탓이다. 함께 리시브 라인을 꾸릴 나경복과는 대표팀에서 잠시나마 함께한 적이 있지만 리베로 김도훈과는 한 번도 합을 맞춰 본 적이 없다. 임성진은 “일단 리시브를 잘 받아 놔야 세터가 편하게 토스를 할 수 있고 팀 능력치도 더 좋아질 거라고 본다”고 짚었다.
팀워크를 위해선 빠른 적응도 필수다. 시즌 개막 전에 새로운 동료들과 호흡을 맞춰 볼 시간도 그리 많지 않다. 황택의, 나경복, 차영석 등 KB손해보험 주축 선수들과는 대표팀에서 먼저 만나긴 하지만 이번 소집 기간이 긴 만큼 개막 직전에나 팀에 합류할 수 있어서다.
임성진은 “나이로 보나 연차로 보나 이제 동료들에게 의지할 때는 지났다”면서 “동료의 몸짓, 눈빛만 봐도 뭘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팀에 잘 녹아들어서 이런 부분들을 빨리 파악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다.
원동력은 우승 욕심이다. 유소년 시절 매년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던 임성진은 아직 프로 무대 우승은 겪어본 적이 없다. 그는 “은퇴하기 전엔 꼭 우승 트로피를 들어보고 싶다”며 “대학 시절까지만 해도 매년 한두 번은 계속 우승해왔는데, 프로에 와서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느꼈다. 6등도 하고 ‘언더독’ 취급도 받으면서 언젠간 꼭대기에 가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대표팀에서의 꿈은 또 다른 자극제다. 2014년 이후 11년 만에 세계선수권대회에 나서는 남자 배구대표팀은 내달 17일부터 24일까지 바레인에서 열리는 아시아배구연맹(AVC) 챌린지컵을 앞두고 있다. 대표팀에 소집된 임성진 역시 지난 8일부터 진천선수촌에 입촌해 담금질에 여념이 없다.
임성진은 “남자 대표팀도 국제대회에 나가서 성적을 내야 인기가 많아질 것”이라며 “대표팀에선 남자배구 흥행에 대한 책임감뿐만 아니라 태극마크 자체의 무게감이 남다른 것 같다. 먼 미래에 한 번쯤은 가장 큰 무대인 올림픽을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누리 기자 nur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