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그때, 그 한 사람

입력 2025-05-17 00:37

중학교에 입학한 아들은 학기 초부터 학교생활에 매우 의욕적이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학교가 너무 재밌다”고 말하는 아이가 다행이면서도 좀 신기했다. 더구나 겨울방학 내내 사춘기 특유의 게으름과 욱함을 오가 속 썩이던 막내가 “건실하게 살려고 한다”니.

응원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 ‘얼마나 가겠나’ 싶은 못 미더움이 있었다. 가족들도 대체로 재밌다는 반응이었다. 4월 중순이 넘어가자 슬슬 아침 기상을 힘들어하고 할 일 미루기와 짜증이 또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렇지.’ 약간의 실망 섞인 판단을 내리려 할 때쯤 밤늦게 퇴근한 내게 아들이 선언하듯 말했다. “내일부턴 아침 6시반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알아서 학교에 갈 거야.” 7시반에 깨우는 것도 힘들어하는 애가 무슨 소린가 싶어 웃었다.

“제대로 살려면 몸부터 건강히 만들어야 한대”를 비롯해 생활습관을 정말 잘 잡아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아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어갔다.

들어보니 그날 학교에 특강을 온 강사 선생님의 이야기가 진심으로 감동적이었고, 그게 너무 좋아서 강연이 끝나고 선생님께 따로 인사도 했다고 했다. “잘했다”고 칭찬하면서도 학교에서 매우 힘주어 준비한 프로그램이나 유명한 강사는 아니었던 것 같아 흘려들었다.

그런데 기적처럼 아이는 그다음 날부터 아무도 깨우지 않는데 혼자 일어나 먹을 것을 꺼내서 먹고 운동하고 등교했다. 방 정리해라, 숙제해라 등의 잔소리에도 쿨하게 “알겠다”고 답했다. 그런 날이 2주째 이어지고 있다.

100번을 잔소리하고, 무섭게 혼을 내도 되지 않던 것이 그렇게 한순간, 한 선생님의 이야기에 달라지다니. 물론 아이는 당장 내일이라도 예전 태도로 돌아갈 수 있다. 그렇더라도 아이 스스로 ‘마음먹으면 나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경험을 해본 것이었다. 그 선생님에겐 어쩌면 늘 해 왔을 평범한 그날의 강연이 적어도 한 아이의 삶에 매우 특별한 순간을 남겼다.

아들의 경험을 보면서 ‘고마운 한 사람으로 인해 삶의 전환점을 맞았다’는 식의 미담이 그렇게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고 생각하게 됐다. ‘사람은 사람으로 인해 망가지기도 하고, 사람으로 인해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는 말에 공감하면서도 막상 내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느끼진 못했던 모양이다.

무의식중에 누군가로 인해 삶이 달라졌다는 건 스스로 변화하기 힘든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얘기일 거로 생각했던 것 같다. 대단한 오만함이었다. 돌이켜보면 영향받지 않은 적이 없는 쪽에 가까웠다.

오랫동안 나를 믿어주는 가족과 친구들만이 아니다. 의외로 기억나는 결정적 순간은 매우 짧은 한마디, 의외의 한 사람, 예상치 못한 만남에 있었다. 대학생 시절 우연히 신앙적인 고민을 나누게 된 교회 한 어른이 “하나님 손을 먼저 놓지만 말라”고 편안히 말해주신 적이 있다.

최근 그때를 다시 떠올리게 됐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자주 그 말 한마디가 내게 큰 힘이었는지 깨달았다.

정말 감사한 분인데, 제대로 인사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스승의 날 즈음이라 용기 내 전화했다. 정작 본인은 그 말을 한 기억도 안 난다면서 “그렇게 기억해주니 너무 고맙다”고 오히려 더 감동받아 하셨다.

삶의 중요한 시기나 위기를 무사히 건너가는 데 필요한 건 그렇게 작지만 중요한 순간, 그곳에 있었던 한 사람일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나 역시, 생각지 못한 순간 누군가에게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남기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짧은 순간, 한 번의 따뜻한 마음, 한마디의 응원으로, 누군가의 삶을 살린 ‘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데 안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오래도록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남을 돕는 선행은 차마 엄두가 안 난다면 말이다.

조민영 미션탐사부장 my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