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쥐 유래 감염병’ 잡자… 연구 본격화

입력 2025-05-16 03:30

사스(SARS), 메르스(MERS), 에볼라(Ebola) 바이러스의 공통점은 ‘박쥐’였다. 이들 모두 박쥐를 자연 숙주로 삼았던 바이러스로 사람에게 전파된 뒤 대규모 감염을 일으켰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대비를 위해 박쥐 유래 신·변종 바이러스를 감시하고 대응법을 연구할 필요성이 제기된 까닭이다.

국내 연구진이 박쥐 유래 바이러스의 감염 과정을 재현할 수 있는 연구 환경(플랫폼)을 구축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최영기 기초과학연구원(IBS)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 연구센터장과 구본경 IBS 유전체교정연구단장이 이끄는 공동 연구팀이 박쥐에서 유래한 오가노이드(유사장기)를 세계 최대 규모로 구축했다고 15일 밝혔다.

오가노이드는 생명체의 장기를 실험실 환경에 맞춰 정밀하게 모사한 것이다. 이전까지 박쥐 오가노이드의 대부분은 열대지역에 서식하는 과일박쥐 일부 종에 한정됐으며, 단일 장기 조직을 재현하는 데 그쳤다. 이번에 IBS 연구진이 구축한 모델은 한국을 비롯해 동북아시아와 유럽에 널리 서식하는 박쥐 5종의 4개 장기 조직(기도·폐·신장·소장)을 재현했다.

연구진은 오가노이드 구축에 그치지 않고 해당 모델을 이용한 실험 역시 진행했다. 이를 통해 코로나바이러스(사스·메르스)·인플루엔자·한타바이러스 등 박쥐로부터 유래한 인수공통바이러스(사람과 동물 사이 상호 전파되는 바이러스)가 특정 박쥐 종과 장기에서만 감염·증식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모델은 치료제 개발 연구에도 직접 활용할 수 있다. 연구진은 모델을 통해 실제 임상에 사용되는 항바이러스제의 효과를 검증했다.

연구를 주도한 김현준 IBS 선임연구원은 “이번 플랫폼을 통해 기존 모델로는 어려웠던 바이러스 분리, 감염 분석, 약물 반응 평가를 한 번에 수행할 수 있게 됐다”며 “실제 자연 숙주에 가까운 환경에서 병원체를 실험할 수 있어 감염병 대응 연구의 정밀성과 실효성을 크게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향후 박쥐 외 동물의 오가노이드도 구축할 계획이다. 연구 결과는 과학 저널 사이언스지에 게재됐다.

윤준식 기자 semipr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