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 지하철에서 빠져 나와 긴 환승 통로를 지나고 있던 때였다. 일사불란하게 걸음을 옮기는 인파 속에서 한 사람이 눈에 걸렸다. 꽃분홍색 모자를 쓴 어르신이다. 복장이 특이한 것도 아닌데 꽤 멀리서부터 시선이 갔다. 주위 사람들과 걷는 속도가 확연히 차이 났기 때문이다. 마치 드라마처럼 그는 멈춰 있고 다른 사람은 빨리 감기로 속도를 높여놓은 듯했다.
한참 뒤에서 걷던 내가 어른신을 따라잡은 것도 순식간이었다. 살짝 굽은 허리와 오른손에 쥔 지팡이가 보였다. 잠시 뒤 환승 통로 중간 무빙워크(수평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자 어르신은 지팡이에 두 손을 얹고 서서 허리를 세웠다. 그리고 ‘휴’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니 과거에 쓴 ‘횡단보도 카드’ 기사가 떠올랐다. 싱가포르에는 걸음이 느린 노인이나 장애인을 위해 횡단보도 초록불 시간을 늘려주는 제도가 있다는 내용이다. 정식 명칭은 ‘그린 맨 플러스(Green Man Plus)’로 2009년 도입됐다. 개념은 단순하다. 노인·장애인용으로 발급되는 교통카드를 신호등 기둥에 설치된 기기에 갖다 대면 초록불 시간이 3초에서 최대 13초까지 늘어난다.
처음에는 5개 횡단보도에서 시작했는데 최근 기사를 찾아보니 1000개 이상으로 확대됐다고 한다. 싱가포르 정부는 2027년까지 전체 주거지역에 있는 횡단보도 절반 정도에 ‘그린 맨 플러스’ 기기를 설치할 계획이다. 특히 고령자나 장애인이 자주 이용하는 편의시설로 연결되는 횡단보도인지 고려해 위치를 선정하는 등 세심하게 제도를 설계하고 있다.
지난해 기준 싱가포르의 65세 인구 비율은 19.9%다. 우리나라보다 조금 늦을 뿐 초고령사회가 코앞이다. 횡단보도 건너는 시간을 늘려주는 것, 이 사소한 제도가 깊은 인상을 남긴 건 노약자 입장에서 그들의 삶을 헤아리는 배려가 느껴져서다.
나이가 들고 신체가 노화하면 어느 순간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상조차 버겁게 느껴질 때가 온다. 건너갈 길이 한참 남았는데 누가 ‘빵’ 하고 성난 경적이라도 울리면 같은 길을 또 가기 망설여질지도 모른다. 그런 이들에게 ‘자신의 속도로 천천히 걸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준다는 건 얼마나 큰 복지일까.
사실 싱가포르는 ‘그린 맨 플러스’ 외에도 일찍이 주택, 고용, 보건·의료, 도시계획 등 사회 각 분야에서 고령화 정책을 시행해 왔다. 특히 2015년 발표한 ‘성공적 노화를 위한 실행계획’에는 70개 이상 광범위한 대응 전략이 담겨 있다.
‘성공적 노화’라는 단어에서부터 정부의 남다른 시각이 엿보인다. 노인을 돌봐야 하고 지원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노화라는 사회 현상에 대비해 모든 국민이 존엄하고 우아하게 나이들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무엇보다 싱가포르 정부는 연령에 관계없이 평생 배우고, 사람을 만나고,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어야 신체적·정신적 노화를 예방·지연할 수 있다고 본다. 노화를 지연해야 장기적으로 국가의 의료비 부담도 줄어든다.
인적 자원으로서 고령층을 활용해야 경제도 발전한다. ‘그린 맨 플러스’는 정책 하나만 놓고 보면 교통 약자 배려 정책이지만 넓게 보면 노인이 더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노화 예방 정책이기도 하다.
우리 정부는 2006년 처음으로 ‘제1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을 발표했고 올 연말에 제5차 계획을 내놓는다. 그러나 저출생 문제에 가려져 그간 노인 문제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게 사실이다. 지난해부터 국민연금 개편, 계속고용 방안, 요양·돌봄 서비스 확대와 의료 격차 해소 등 노인 삶과 직결된 중대한 논의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에는 현 고령층의 건강상태와 사회적 인식 등을 고려했을 때 통상 65세인 노인연령 기준을 70세로 단계적 상향해야 한다는 전문가 제언도 나왔다.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69세는 건강하고 70세는 건강하지 않다거나, 69세는 충분히 일할 수 있고 70세는 사회생활이 어렵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큰 방향은 60대든 70대든 80대든 연령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걸 추구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닌가 싶다. 각기 다른 걷는 속도마저 포용할 수 있는 사회라면 조금은 자신 있게 나이들 수 있지 않겠는가.
박상은 사회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