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실패가 부른 조기 대선
협치 제도화 요구 쏟아졌지만
후보들 10대 공약서 개헌 실종
이제라도 다시 선거 의제 올려
세 후보 함께 국민에 약속하길
그들이 외면할 수 없도록
유권자 목소리 더 키워야
정치가 조금이라도 바뀐다
협치 제도화 요구 쏟아졌지만
후보들 10대 공약서 개헌 실종
이제라도 다시 선거 의제 올려
세 후보 함께 국민에 약속하길
그들이 외면할 수 없도록
유권자 목소리 더 키워야
정치가 조금이라도 바뀐다
캐나다 호주 싱가포르 등 지난 몇 주 새 선거를 치른 나라마다 표심을 움직인 건 트럼프였다. 정권 교체가 자명해 보였던 캐나다와 호주는 반(反)트럼프 여론이 선거판을 점령하면서 중도좌파 집권당이 예상을 뒤엎고 압승을 거뒀다. 트럼프를 벤치마킹하던 양국 보수 야당 대표는 나란히 의원직마저 잃었다. 싱가포르 여당은 압도적이던 의석을 더욱 늘렸는데, 여기에 작용한 트럼프 효과는 위기감이었다. “수출 경제의 호시절이 끝났다”는 총리의 의회 연설이 ‘안정’에 표를 몰아주는 결과로 이어졌다. 영국 집권당의 지방선거 참패는 트럼프 대처에 대한 실망감이, 에콰도르 대통령의 재선은 트럼프와의 브로맨스 기대감이 작용했다고 한다.
반감이든 위기감이든 기대감이든 각국 선거는 ‘트럼프’가 이슈였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관세를 때리고 동맹을 흔드는 좌충우돌에 세계 질서가 뿌리째 바뀌고 있다. 그 충격이 나라마다 사람들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니 최대 공론장인 선거에서 국가 진로를 다시 설정하는 논의가 벌어졌다. 갸우뚱한 것은, 우리도 선거를 치르고 있는데, 그것도 대통령 선거인데, 트럼프 얘기가 좀체 나오지 않아서였다. 벌써 한 달 넘게 진행 중이지만, 트럼프와 그로 인한 여러 난제를 말하는 후보는 찾기 어렵다. 그나마 통상을 출마 명분에 넣었던 한덕수 총리가 하차하면서 트럼프도 함께 선거판에서 사라졌다. 미국과 그토록 밀접히 얽혀 있는데, 선거 의제만 보면 ‘트럼프 무풍지대’에서 사는가 싶다.
이번 대선의 특수성 때문이라 말할 순 있겠다. 비상계엄과 탄핵 사태의 국내 문제가 너무 컸다. 독재 시절의 악몽이 살아나고 대통령 탄핵의 비극을 되풀이하며 격랑의 시간을 보냈다. 와중에도 막장 정치가 계속돼 극심한 분열을 겪었으니, 내 코가 석 자인 선거라서 나라 밖 문제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없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정치를 복원하고 통합을 일궈내는 그 문제는 과연 이 선거에서 제대로 다뤄지고 있을까.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난 12일 이재명 김문수 이준석 세 후보가 일제히 꺼낸 10대 공약 목록에서 ‘개헌’이 보이지 않았다.
이준석 후보가 명시적 개헌 언급 없이 ‘대통령 힘 빼고 일 잘하는 정부’를 공약에 담은 게 그나마 정치 복원 이슈를 건드리고 있었다. 거대 양당 후보의 공약에는 정치 개혁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다. 이재명 후보는 ‘내란 극복’ 범주 아래 국회 계엄해제권 강화를, 김문수 후보는 ‘특권을 끊는 정부’라면서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폐지를 말했을 뿐이다. 지난 100여일 한마디 한마디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트럼프’ 이슈가 선거 의제에 끼어들지 못한 것처럼, 지난 몇 달 이렇게는 안 된다면서 온갖 구상과 로드맵을 쏟아냈던 ‘개헌’도 선거판에서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개헌은 탄핵 정국의 이슈 중 유일하게 미래지향적인 의제였다. 8년 만에 재연된 실패를 더는 반복하지 말자, 그러려면 이참에 정치 시스템을 확 바꿔야 한다는 논의가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선거에서 처음부터 찬밥 신세였던 것도 아니다. 이재명 김문수 후보도 경선 때는 “국민이 원하는 권력구조”와 “87년 체제 극복”을 말했는데, 민주당 김두관 김경수 김동연, 국민의힘 안철수 홍준표 한동훈, 그리고 한덕수까지 개헌을 주장한 이들이 하나둘 탈락하면서 힘을 잃었다. 개헌 의지는 권력과의 거리에 반비례한다는 말처럼, 최종 후보들은 개헌이 사라진 공약집을 들이밀었다.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후 반년이 흘렀다. 그 사이 나라 안팎에서 벌어진 가장 큰일은 트럼프로 인한 세계 질서 격변과 한국 정치의 실패가 부른 민주주의 후퇴였다. 내우외환이라 불러야 할 두 겹의 위기 속에서 그 대응과 처방을 논할 선거가 마침내 열렸지만, 정작 두 문제를 아무도 거론하지 않는다. 안 해도 이긴다는 건지, 해봤자 표가 안 된다는 건지, 알 수 없는 침묵 속에 선거의 시간은 흐르고 있다.
투표까지 채 3주도 남지 않았다. 적어도 정치 난맥상을 바로잡을 개헌만큼은 다시 의제가 돼야 할 것이다. 중임제니, 양원제니 형식은 중요치 않다. 권력 분산을 통한 협치 제도화. 이를 세 후보가 나란히 약속하고 선거 후 실천에 나서게 만들어야 한다. 좋은 영화가 드문 배경에 그런 영화를 찾지 않는 관객의 몫도 있듯이, 필요한 의제를 요구하는 유권자의 목소리가 커져야 정치가 바뀔 수 있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